임혜현 기자 기자 2015.07.28 10:52:12
[프라임경제] 존 그리샴의 소설 중에는 기업인들이 주식 폭락에 대비하는 '헤지' 기법이 종종 목격된다. 폐기물 매립으로 환경 오염을 유발한 대기업과 지역 주민의 집단소송을 다룬 '어필'이나 돌연사를 유발한다는 논란에 선 콜리스테롤 강하제를 놓고 제약사와 소규모 로펌이 격돌하는 '소송사냥꾼'이 대표적인 예다.
이 소설에서 공격으로 주가 하락을 맛본 기업들은 해외의 차명 계좌와 자금 등을 동원해 자사의 주식을 매집하는 한편 공매도 가능성 등 다양한 전략을 짠다. 결국 약자는 소송에서 이기기도 어렵지만, 소송에서 이기든 지든 주가가 오르든 떨어지든 대기업은 손해 대신 오히려 이익을 챙긴다.
이 같은 기업의 헤지는 방어적 측면이지만, 이를 공격적인 본업으로 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특히나 이 같은 활동을 통해 돈벌이를 시도하기에 우리나라가 유독 유리하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바로 삼성물산 사태가 시사하는 경영권 방어 허점의 또 다른 병폐다.
◆주식매수청구권 가격하회 국면 삼성물산, 엘리엇은 손해?
28일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주주 증명서 반납을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재계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삼성 흔들기'를 그만 두고 주식을 팔고 떠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 증서를 보유해야 주주총회 소집 요구 등 다양한 권리 행사가 가능하며 반대로 이를 보유하면 지분 매각이 제한된다. 이번 일을 '출구전략' 신호로 시장이 보는 이유다. 하지만 이면에 다른 뭔가가 있다는 풀이도 가능해 관심을 모은다.
삼성물산의 주가는 합병 승인이 주주총회에서 승인된 이후 계속 힘을 받지 못하다가 이 같은 엘리엇발 소식이 알려지자 28일 개장 직후 600원 하락에 이어 개장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1000원 하락(5만6900원)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당초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했으나 이 같은 흐름은 행사가격인 5만7234원에 주가가 근접, 시점에 따라선 오히려 하회하는 상태를 유발함으로써 일말의 가능성에 대한 시장 우려를 더하고 있다.
엘리엇 철수 가능성이 악순환을 유발하고 있는 것인데 적절한 시점에 적합한 크기의 폭탄이 터진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여러 상황과 그간의 흐름을 볼 때, 엘리엇이 '손절매'를 해서라도 떠나는 것이 정말 맞는지다. 이 같은 하락장을 즐기거나 유발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기는 어렵기 때문.
엘리엇으로서는 주주총회에서 자사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추진동력이 상당히 떨어졌다는 진단이 나온 바 있다. 이번에 증명서 반납 건을 통해 시장의 잠재된 불안감에 다시금 불을 지피고 주도권을 회복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실 주식의 상당 부분을 팔아치워도 엘리엇이 삼성 괴롭히기에 나설 가능성은 충분하다. 자기자본 1000억원 이상의 상장사는 주식 0.5%를 6개월 이상 보유하는 주주에게 주주제안 등을 가능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따라서 지분 0.5% 이상 수준만을 유지하면서 보유기간을 충족시킨 뒤 엘리엇이 각종 주주권 행사에 나설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다중투자로 땅짚고 헤엄? 친절한 한국시스템
헤지펀드들은 투자에 대해 상당한 감각과 정보 활용 능력을 통해 얻은 판단력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들이 유능하다는 평을 얻는 것은 이뿐만 아니라 손실을 헤지하기 위해 투자한 것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이익을 보는 선물이나 옵션에 다중으로 투자하는 등 방패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풋옵션(일정 시점에 주식을 팔 수 있는 권리)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한 시점에 주가가 빠졌을 경우 이익을 보도록 해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리엇은 삼성물산에 대한 공세를 취하러 한국 시장에 들어왔다가 자칫 주가의 하락 국면을 접하더라도 적어도 큰 손실만은 방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같은 기법은 보통 소송 등 위기 국면에서 자사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방어적'으로만 행사되는 경우가 있고, 엘리엇의 경우처럼 기업 흔들기와 결합시켜 '공세적'으로 쓰는 경우로 대별된다는 점이다.
자사 주식에 투자를 해야 하는 문제라는 면에서 해외 자금 파이프라인 등을 동원해 은밀히 해야 하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 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엘리엇의 경우 태생적으로 자금의 활용과 투자를 업으로 삼은 만큼 이런 행동에 제약을 느끼지 않을 뿐더러 방법도 한층 정교하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출구전략을 단행하는 시늉을 언론을 통해 흘림으로써 엘리엇이 얻을 바는 적지 않다.
우선 증명서 반납 이슈를 만들고 주가의 향배를 가늠하면서 매수청구권 행사 정국에 돌입하면 발언권이 커지므로 이를 멀리 봐 삼성 흔들기의 동력으로 가져갈 수도 있다. 아울러 다중투자를 했다면 한국 투자자들의 손실은 염두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을 털면서 이익만 챙길 수도 있다.
이런 와중에 이 같은 횡포 시나리오가 가능하도록 하고, 더욱 힘을 키워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필요하다. 가장 큰 문제는 일개 헤지펀드가 자금력을 집중 동원하기만 해도 기업을 흔들 수 있는 한국적 특수성이다.
그 두 갈래 중 하나는 순환출자 같은 한국 재벌의 구조적 한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영권 방어책이 별달리 없는 글로벌 스탠다드와 다르게 움직이는 우리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엇만 해도 기존의 헤지펀드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상사법과 재벌의 순환출자구조에 관해 깊게 분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주주의 이익극대화라는 구호를 내세움으로써 여론과 주주들의 호응을 일부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시 후 엘리엇펀드의 소수주주권 활용 태도를 보면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삼성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엘리엇은 주주총회를 앞두고 삼성물산의 정관을 변경, 현물배당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주주제안권을 행사했다. 2011년 법 개정으로 금전배당으로 한정했던 주주배당을 회사의 편의를 도모할 목적에서 현물배당도 가능하도록 했다.
삼성물산이 정관변경을 했다면 그 배당의 목적물은 삼성전자가 됐을 텐데, 이렇게 되면 현재 구조상 삼성 전반을 흔들 수 있는 힘이 엘리엇 손에 들어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재벌이 순환출자 등 구태를 못 벗는 것, 창업주 후손들이 이 구조를 활용해 군림해왔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대기도 어렵다는 점 등은 차제에 논의하더라도 경영권 방어에 취약한 법률적 시스템이 문제를 키우는 것은 이제 외면하기 어렵게 됐다.
그 병폐가 무척 심각하다는 점이 엘리엇이 삼성 흔들기를 시작한 초기부터 제기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액면상으로 보면 출구전략을 하는 상황에서 이것이 손절매이든 다중투자를 위해 돈벌이판을 키우려는 시도이든 한국 시장 전체가 출렁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는 해외 투기적 자본의 공격에 우리가 '고삐를 잡기는 커녕' 오히려 반대 상황으로 국면을 조성시켜 주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영권 방어 취약이라는 문제가 '상황 주도권'을 넘겨주고, 심지어 나쁜 의도로 힘을 발휘해 돈을 벌자는 유혹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자산가치 등으로 보면 글로벌기업이지만 아직 경영권 방어가 취약한 한국적 재벌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데 엘리엇 같은 회사들이 전혀 위험을 느끼기 않는 결과를 부룰 수있다.
영미권 기업과 달리 경영권 방어가 힘들기 때문에 이런 점을 악용, 해당 한국 기업을 흔들어 최대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다른 돌발변수가 생기거나 혹은 주가가 하락하는 상황을 고의로 유발하려면 다중투자로 위기를 분산하는 기법을 십분활용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韓 낡은 경영권 방어시스템 '헤지' 악성진화 촉진?
재계에서는 그간 우리 상사법 체계가 경영권 방어에 유독 인색하다며 제도적 손질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문을 해왔다.
우선 미국에서 크게 활용되고 있으며 일본도 도입한 바 있는 '포이즌 필'이 다시금 주목받는다. 법무부는 이번 엘리엇 사태를 계기로 포이즌 필 추진 가능성을 언급했다. 법무부는 이미 한국형 포이즌 필 추진에 나선 바 있으나 경제민주화 바람 속에 무산된 바 있다.
포이즌 필은 회사에 적대적 합병(M&A)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의 주식 수를 압도적으로 늘림으로써 외부인이 경영권을 빼앗을 만큼 충분한 주식을 사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적대적인 M&A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황금주는 합병을 거부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일부 주식에 주는 것이다.
물론 주주들이 상법 기본 정신에 충실하게 각자의 지분에 따라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영미식 문화와 우리 풍토가 다르므로, 이 같은 제도가 막바로 수입될 경우 재벌적 병폐를 키우는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는 걱정도 만만찮다.
하지만 엘리엇이 근래 보인 삼성 흔들기의 모습이나 특히 이번에 증명서 반납 국면으로 인한 삼성물산의 주가 급락 사태 등을 눈여겨보면 이런 우려보다는 경영권 방어책 강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우리도 해야 할 때로 보인다.
적어도 경영권 방어 기법이 다른 나라와 달리 유독 허술하기 때문에 들어올 때든 나갈 때든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고, 좋게 풀리면 최강의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국면이 조성되는 '쉬운 시장'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경영권 방어책 부재 상황이 투기자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격적 해외자본에 상황 주도권 좀 더 과장해 말하자면 기업과 그 투자자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오롯하게 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생각할 때 더 그렇다.
이번 엘리엇 행보가 삼성물산 지분의 눈물겨운 손절매냐, 오히려 하락을 유발하려는 다중투자의 현란한 기술 발휘냐라는 추리는 경영권 방어책 도입에 대한 진중한 시사점을 남겼다는 점에서 비싼 수업료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