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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가게 칼럼] 감자의 우여곡절 유럽 상륙기

송준 칼럼니스트 기자  2015.07.24 15: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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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인류가 경작을 시작한 이래, 감자처럼 단독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작물도 없었다. 수백 년 전 남미에서 온 자그마한 식물이 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손쉽게 먹는 감자들은 약 7000년 전 잉카의 조상들이 안데스산맥에서 감자를 재배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안데스산맥의 고원지대야말로 다양한 감자의 중심지였다. 잉카사람들은 대대로 파란 감자, 붉은 감자, 노란 감자, 오렌지 감자를 비롯해 수확기가 길거나 짧은, 단맛이 나거나 쓴맛이 나는 감자 등 3000여 종의 감자를 재배했다.

남미에서 출발한 감자가 유럽에 자리 잡기까지엔 모든 외래종 식물이 그렇듯 여정이 만만찮았다. 토양이나 기후와 같은 자연조건도 그랬거니와 사람들의 생각이 더 큰 문제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새로운 작물이 다른 어떤 작물 보다 안정된 수확량을 보존해 주고 심지어 재배 방식도 편리하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감자를 대하는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 사람들로서는 성경 어디에도 기술되어 있지 않은 이 작물이 생소했고, 특히 아메리카 피지배 민족이 주식으로 삼았던 작물이라는 점 때문에 꽤 오랜 기간 동안 감자와 거리를 뒀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중세유럽 왕실은 감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감자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농민들에게 감자를 강제로 심도록 했다.

프랑스는 교묘한 방법을 썼다. 백성들로 하여금 보다 자연스레 감자를 재배하도록 왕실의 권위를 살짝 내려놓는 방법을 이용했는데,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 머리에 감자 꽃을 여러 송이 꽂도록 하는가 하면, 왕실 정원에 감자를 심어 최정예 왕실 수비대가 이 감자밭을 지키도록 했던 것이다. 

루이 16세의 예상은 적중했다. 농민들은 이 작물이 매우 귀한 것이라 여기고 몰래 왕실 정원에 잠입해 감자를 훔쳐 재배하는 일이 번번했다. 덕분에 감자가 보다 널리 보급됐고, 농민들의 영양실조와 기아 현상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1588년 폭풍우에 난파한 스페인 군함으로부터 흘러나온 감자가 아일랜드 해안으로 밀려온 이래 아일랜드에서는 감자가 자연스럽게 재배작물로 자리 잡았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면적이 충분치 않은 황폐한 땅이라도 기존의 밀에 비해 넉넉하게 가족과 가축을 먹일 수 있는 수확량과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력으로 재배가 가능한 감자에 매료됐다.

감자 재배엔 많은 일손이 필요하지 않았다. 또 특별한 농기구가 없어도 약간의 땅에 그저 씨감자를 흩어 놓고 아무 흙이나 덮어주기만 하면 됐다.

감자는 영양 면에서도 훌륭했는데, 우유와 감자만으로도 부족함 없는 열량을 얻을 수 있었다. 탄수화물과 단백질, 비타민B와 C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감자 덕분에 유럽에서는 괴혈병이 점차 사라지는 등 건강 풍토도 바뀌어갔다. 

요리법도 간단해 끓는 냄비 속으로 또 불 속으로 던져서 삶거나 구워 익히기만 하면 누구나 간단하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에게 감자는 꽤 오랫동안 하찮은 작물로 여겨졌다. 당시엔 음식재료에도 신분이 있었는데, 위에서 아래 순서였다. 즉, 하늘을 나는 조류가 가장 귀했고, 그 다음이 땅 위를 돌아다니는 동물이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은 낮은 재료로 인식됐던 것이다.

식물 중에서도 공중에 열매를 맺는 것은 그나마 나았지만, 이와 반대로 보이지 않는 땅속을 기는 덩이식물은 천한 식재료로 통했다. 당시 유럽에서 감자가 받았을 푸대접을 가늠할 만한 대목이다.

영국인이 감자를 받아들이는 데는 다른 유럽국가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때 영국에서는 자신의 식민지인이었던 아일랜드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 '돼지나 먹는 감자를 먹는 아일랜드인'이라는 말까지 썼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됐다. 영국이 프랑스와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면서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 때 곡물 가격은 치솟았고,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저렴하면서도 영양 높은 감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후 감자는 영국에서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


송준 칼럼니스트 / 다음 라이프 칼럼 연재 / 저서 <오늘아, 백수를 부탁해>, <착한가게 매거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