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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JUMPING' 중국 왕잉 VS 일본 나카가와 마이

세계 대회 첫 출전 金 왕잉·멈추지 않는 도전 銅 나카가와 마이

김성태 기자 기자  2015.07.10 09: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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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이번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의 다이빙 종목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변이 속출했다.

남자 싱크로 10m 플랫폼 종목에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1년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중국의 훠 량(火亮, Huo Liang)이 예선전에서 어이없이 탈락했다. 그런가 하면, 여자 플랫폼에서는 세계대회 첫 출전인 중국의 신예 왕잉이 단번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던 일본의 나카가와 마이도 이번에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세계대회 첫 출전에 금빛 점핑 성공 '왕잉'

지난 5일 열린 여자 플랫폼 결승전, 한 중국 선수의 다이빙에 보는 이들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 중국의 신예 왕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총 345.00포인트를 기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놀라운 것은 이번 유니버시아드가 1위를 거머쥔 왕잉의 세계대회 첫 출전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신출내기 금메달리스트의 고난과 인내로 점철된 다이빙 이력이었다. 1995년생으로 올해 스무살이 된 왕잉은 이미 6살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나 다이빙 전문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훈련을 받아온 중고참 선수였다.

충칭시(重庆市)가 고향인 왕잉은 6살 때 우연히 한 다이빙 코치의 눈에 띄게 된다. 당시 수영을 배운 적도 없었던 어린 왕잉은 그 길로 충칭시의 체육학교 다이빙반에 입학하게 됐고, 그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난 기숙사 생활이 시작됐다.

6살의 나이에 낯선 곳에 홀로 떨어졌지만, 어린 왕잉에게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는 훈련이 이어졌고,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9살 왕잉은 충칭시의 최연소 다이빙 전문선수가 됐다.  

어린 나이부터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졌던 덕택에 왕잉은 다이빙을 할 때도 다른 선수들보다 떨어질 때 부상이 적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다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이빙은 한 가지 동작만 잘못해도 얼굴이 멍들고 붓는다. 내가 제일 심하게 다쳤을 때는 눈이 부어서 뜨지도 못했다" 언젠가 왕잉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그녀의 눈은 늘 '팬더눈'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운동선수에게 부상보다 더 무서운 슬럼프가 찾아왔다. 12살 사춘기에 찾아온 슬럼프는 왕잉의 지난 6년을 흔들었다. 예전에 익혔던 기본동작을 반복하는 것도, 새로운 동작을 배우는 것도 모두 힘들기만 할 뿐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운동선수에게 필수인 체중조절이라는 난관도 함께였다. 한창 성장기인 12살에서 14살이 될 때까지 왕잉은 밥을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었다.

밀려드는 허기를 잊기 위해 차라리 잠을 청해야 했다. 하지만 슬럼프와 배고픔과 맞서 싸우면서도 왕잉은 다이빙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18살이 된 2007년 마침내 전국다이빙선수권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왕잉의 첫 번째 다이빙은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고 9.1의 높은 점수도 얻었다. 그러나 두 번째 다이빙에서 그만 실수를 하는 바람에 개인 8위 조차 들지 못했다.

게다가 첫 번째 경기 이후 왕잉에게는 한 가지 징크스가 생겼다. 일반 대회에 참가할 때는 항상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한 단계 높은 큰 대회에 출전하면 어김없이 실수를 해서 기록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사실 왕잉은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다이빙 동작을 연습해오고 있었다. 기본 소질과 능력이 바탕이 돼야 가능한 동작들이었다.

그래서 왕잉은 지금도 중국에서 유일하게 한 세트 중 2가지 고난이도 동작을 할 수 있는 선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난이도가 높은 동작이 그녀의 자신감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그런 악순환이 계속됐다. 결국 왕잉은 2013년 전국체전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합에만 열중할 것을 결심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기록을 깨뜨릴 수 있었다.

그는 대회에서 성공적인 다이빙을 선보였고, 개인 4등으로 그동안의 성적 부진에서 벗어났다. 이로써 그동안의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던 왕잉은 자신의 목표로 다음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따는 것으로 선언했다.

실제로 올해 충칭시에서 열린 아레나컵 전국청년다이빙챔피언전(다이빙선수권대회) 및 제1회 전국청년운동회다이빙자격전에서는 여자 개인 종합 3위를 차지했다 

이어 왕잉은 이번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에서도 당당하게 여자 플랫폼 1위와 여자 싱크로 10m 플랫폼에서 3위를 획득했다. 유니버시아드에서의 금메달로 세계무대를 향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세계무대 향한 끝없는 도전 '나카가와 마이'

이번 유니버시아드의 여자 플랫폼 종목에서 나카가와 마이는 소원대로 메달을 목에 걸었다. 노란 금빛이 아닌 동메달이었지만, 이번 대회에서의 메달 소식은 마이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도쿄 출신의 마이가 처음 치렀던 경기는 'Speedo USA 다이빙 그랑프리'였다. 당시 마이의 코치는 마사우카 히로아키(Masauka Hiroaki)였다.

마이는 경기의 토너먼트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좋은 점수를 받았다. 여자 플랫폼 부문의 8강전에서는 10등을 했고, 준결승전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여자 싱크로나이즈 플랫폼에서 그는 2위를 차지했다.

카타르의 도하(Doha)에서 열린 2006 아시안 게임에서 마이의 기록은 더 나아졌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그 노력의 성과로 10m 싱크로나이즈 플랫폼 부문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당시 그의 파트너는 미사코 야마시타(Misako Yamashita)였다.

아시안게임에서의 좋은 성적에 힘입어 마이는 세계무대로의 도약을 시도했다. 2008 AT&T 다이빙 그랑프리에서는 8강전에서 8위를 했지만 악착같은 승부 근성을 발휘해 준결승전에서 3위, 결승전에서는 6위를 했다.

그 다음 해인 2009 AT&T 다이빙 그랑프리에서도 그는 또 다시 여자 3m 싱크로나이즈 스프링보드 결승전에서 6위에 랭크됐다. 2011년 AT&T 다이빙 그랑프리에서는 싱크로나이즈 3m 스프링보드 다이빙 결승전에서 5위를 했다. 눈에 띄게 성적이 오르지 않았지만, 마이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여자 10m 플랫폼다이빙의 예선전에서 9위를 차지하며 결승까지 올랐지만 아쉽게도 11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스스로와 싸워야 했던 절치부심의 시간들이 흘렀고, 그럼에도 마이는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9년 로마에서 열린 월드 아쿠아틱 챔피언십 ( World Aquatics Championships)의 여자 3m 싱크로나이즈 스프링보드에서 8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순위를 끌어올렸고,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여자 3m 스프링보드 다이빙에서 3등을 기록해 동메달을 얻었다.

2011년 열린 월드 챔피언십에서는 결승전까지 올라가지 못했지만, 일본 수영연합에서는 마이를 2012년 런던 올림픽 다이빙 부문의 유일한 참가자로 결정했다.

지난 2011년 베이징 올림픽의 여자 10m 플랫폼 경기에서 11위를 한 이후 두 번째 출전하는 올림픽 대회였다. 하지만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마이는 여자 플랫폼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안타깝게도 18위에 머물며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마이는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해 여자 플랫폼 부문에서 금메달보다 더 귀한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를 발판으로 내년 리우 올림픽의 무대로 또다시 도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