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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찬찬히읽기]어느 겨울밤 - 최창균(1960~)

프라임경제 기자  2007.05.06 2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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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어느 겨울밤 - 최창균(1960~)

자다 깬 어느 겨울밤이었다
얼어붙은 어둠을 뚝뚝 분지르며 나가
축사 앞 쇠똥 더미에다 오줌 누려 했더니
그 자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질 않은가
볼일 보면서 생각해보니 혹시 누군가
나처럼 이곳을 방금 전에 다녀갔다는 것인데
순간 머리가 서고 귀가 확 열리더니
축사 안에서 무슨 기척이 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두엄 더미에 늘 꽂혀 있는 쇠스랑 거머쥐고
시커멓게 소들이 매여 있는 축사 안을 주시하니
아니나다를까?
그 기척의 누군가가 어른거리는 것이 아니던가
그때까지도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았던 나는
쇠스랑 높이 치켜들고 슬금슬금 다가갔는데
갑자기 이놈아 여기 네 애비다 하는 소리
거기 칠흑의 어둠을 인광으로 밝히며
소에게 깔 짚 넣어주고 있는 아버지였다
산다는 것이 저리 자다 깨어서도
꼼지락거려야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쇠스랑으로 두엄을 쳐내고 있는 것이었다

<‘백년 자작나무 숲에 살자’중에서, 창비, 2004)


자다 깨서 오줌을 누러 나온 시간이면 어쩌면 이른 새벽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오줌을 누려고 하는 자리에 김이 모락모락 난다. 누군가 먼저 오줌을 누고 지나간 것이다. 축사 어둠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소도둑이라도 든 것일까 하고 두 손으로 쇠스랑 높이 치켜들고 축사 쪽으로 다가가다가 “이놈아 여기 네 애비다” 하는 아버지의 소리를 듣는다.

긴 겨울 밤, 아버지도 오줌이 마려워 밖으로 나오셨겠지. 겨울 추위 속에서 밤새 소들이 잘 있었는지 궁금하셨겠지. 축사를 둘러보다가, 좀 덜 추우라고 깔 짚을 넣어주고 싶으셨겠지. 겨울 새벽어둠 속에서 축사를 돌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상황이 인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황을 그려낸 시적 표현들이 살아 있다. 가장 좋은 시적 표현이란, 기묘한 어휘들로 꾸미는 표현이 아니라, 가장 실감나게 그려내는 표현이 아니겠는가? 일하는 아버지와 일하는 아들의 모습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전무용/시인
1956년 충북 영동 출생
한남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3년 <삶의 문학> 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희망과 다른 하루>(푸른숲)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시 전문 계간지 <시와 문화> 필진
현재 대한성서공회 번역실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