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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배우가 미칠 수 있는 곳은 연극무대”

김훈기 기자 기자  2007.05.04 03: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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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솔직하고 거침없는 말투, 주위를 휘어잡는 카리스마, 낭만적인 로맨티스트, 독불장군.

배우 김성준(본명 김진근. 37세)을 이야기 할 때 등장하는 말들이다. 모두 다 ‘색깔’있는 말들이기 때문에 도무지 한 사람을 지칭하는 생각할 수 없는 말이다.

실제로 직접 만난 김성준은 악수와 명함이 오가는 5분여 사이에 벌써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오랜 친구를 대하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연극·영화·TV드라마를 넘나들며 자신을 교육하고 있다는 그는 직접 내부 장식을 꾸민 40석 가량의 소극장(청담동 ‘fun space theater’)을 운영할 정도로 연극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배우가 소극장을 운영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배우가 미칠 수 있는 놀이터는 연극무대죠. 일이 없다면 방종하게 살기 쉽거든요. 늘 연기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 수 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계기가 되거든요”라고 단숨에 정리해 버렸다.

◆소극장 운영할 정도로 연극에 대한 애착 강해

그가 처음 소극장을 연 것은 2003년이다. 그곳에서 10년 정도 연극을 하며 관객과 호흡하고 배우로서 에너지를 충전하려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서 연극을 공부한 경험을 되살려 2년 동안 성균관대학교와 안양에 있던 신상옥 필름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가르친 적이 있다. 소극장에서도 현역 배우들나 지망생들과 같이 워크숍도 열고 연기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한다. 소극장 첫 작품은 소설가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였다.

드라마 ‘눈꽃’에 출연했고, 지난해 단막극으로 상을 타면서 조금씩 알려졌지만, 김성준이라는 이름은 국내 연예계에서는 아직 낯설다. 2004년에 어머니의 간청으로 김진근에서 김성준으로 개명한 이유도 있다. 그러나 데뷔가 고대 경영학과 재학 중이던 1995년 연극 ‘햄릿’이어서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던 이유도 있다.

당시 60~70년대를 풍미했던 배우 고(故) 김진규씨의 아들이 연극을 한다고 아침방송에 출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연기를 잘 모르던 시절 ‘햄릿’을 연기한 후 ‘깨달은바’가 있어서 도미를 해 버린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기보다 스스로 두 발로 서고 싶었던 것.

그의 말을 빌리면 “준비 안 된 배우가 햄릿을 연기하는 것은 준비 안 된 피아니스트가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배우 망치는 길이라고 했는데, 역할이 왔으니까 목숨 걸고 했죠. 무대를 처음 알았고, 연기가 너무 좋았지만, 연기가 어려운 것이란 걸 알게 되어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된 거죠”

   
 
 

고국에서의 연기 경험은 외려 핏속에 침잠해 있던 배우 기질을 깨우는데 충분했다. 햄릿이 준 경험이 연기에 대한 일종의 '외사랑'을 하게 한 것이다. 그가 미국 땅에서 선택한 곳은 뉴욕의 연기학교 액터스 스튜디오(The Actors Studio).

이곳은 연극 지도자이자 연출가였던 스트라스버그가 1947년 설립한 곳이다. 스칼렛 요한슨이나 로버트 드 니로, 말론 브란도와 같은 걸출한 배우들을 배출한 곳이다.

김성준은 여기서 4년 동안 시쳇말로 골방 같은 아파트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배우 지망생의 형형한 눈빛을 품게 된다. 당시 그는 “로버트 드 니로나 말론 브란도 같은 배우들도 우리처럼 이러고 있었을 텐데, 10년 20년 뒤에 그들보다 잘못되리란 법은 없지 않냐?”며 친구들에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다보니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기도 했다고.

골방에서의 ‘라면공부’ 4년을 채워가던 그에게 기회가 다가왔다. 영화 홍보를 위해 캐나다를 찾은 강제규 감독의 통역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강 감독은 김성준이 다니던 엑터스 스튜디오도 방문한다. 이때 김성준을 눈여겨봤던 강 감독은 2000년 영화 ‘단적비연수’의 ‘부치’ 역을 그에게 맡기게 된다. 영화배우로 고국에서의 첫 데뷔였다.

2002년 두 번째 영화 ‘리앙크루’는 사실 그에게 아픔을 준 영화이기도 하다. 혈기 충천, 겁날 것 없던 미국 유학파 연기자 김성준은 이 영화를 작업하면서 감언이설에 넘어가 변변찮은 담보를 받고 2억원을 발려줬다가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 인생 수업료 치곤 컸던 셈.

◆배우는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

“아직도 그 돈 갚느라 고생하고 있지만, 인생 공부하느라 쓴 수업료라고 생각해요. 그걸로 인해서 제 속의 모난 점들, 안하무인 했던 것들을 많이 깨버렸으니까요. 배우는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인데, 가끔 한 번에 백 걸음을 걸으려는 사람들을 보면 제 경험을 꼭 들려주곤 해요” 

이후 마음의 변화를 겪은 그는 화가 나다가도 촬영장만 가면 신이 나서 누구에게나 미소를 짓는다고 한다. 한 컷을 찍기 위해 몇 시간씩 고생하는 스텝이나, 신인 연기자들의 고충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변하면 내 주위의 환경도 변하는 법. 2003년 영화 ‘아카시아’에서 의사 ‘도일’역을 맡으며 세 번째 영화 만에 주연 자리를 꿰차게 된다. 당시 이 영화를 위해 그는 산부인과에서 한 달 반을 살았다.

이후 2004년 영화 ‘주홍글씨’를 거쳐 드라마로 발을 넓히며, 제5공화국(2005)과 불량 주부(2005), 2006년 SBS ‘눈꽃’과 MBC 창사특집 단막극 ‘직지’에 출연하게 된다. ‘직지’에서 스님 역을 맡아 삭발투혼을 발휘해 2006년 연말 MBC ‘연기대상’에서 단막극 부문 특별상을 수상한다.

   
 
 

피 내림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그의 말대로 가계도를 찬찬히 톺아보면 축구팀을 꾸릴 정도로 예인들이 많다. 1960~70년대 ‘벙어리 삼룡이’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의 영화로 명성을 날린 배우 고(故) 김진규(1923~1998)씨가 그의 아버지임은 앞서 밝힌 바다. 어머니 역시 60년대 유명 배우인 김보애씨다. 바로 위 누나는 80년대 영화배우로 이름을 날린 김진아. 이모부중 한 분은 80년대 유명세를 탔던 코미디언 이규혁씨이고, 다른 한분은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는 이덕화씨다. 개그맨 최병서씨도 친인척지간이다.

이런데도 그의 연예계 데뷔는   늦게 이뤄졌다. 그러나 김성준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부탁하면 한 작품 들어갈 수 있었죠. 하지만 ‘내가 준비돼서 직접 캐스팅 되어야 한다’는 고집. 아버지의 그늘이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준비도 안됐는데 그냥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평생 할 건데 늦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귀국 후 오디션만 50번이나 봤지만 모두 고배를 마셨다는 그가 연극에 몰입하는 이유가 어쩌면 집안 내력에 대한 ‘반기’일 수 있다. 차려놓은 밥상에서는 수저를 들지 않겠다는, 스스로를 만들겠다는 자존감이 지금의 그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기 때문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미친다’는 말을 화두처럼 꺼내는 그가 연기에 몰입하는 이유가 갈피 잡힌다. 배우로서 화려한 것에 솔깃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을까? 그 역시 두 마음 사이에서 이겨내기 위해 연극을 택한 것이다. 연극에서 내면의 자신과 만나 화해하며 에너지를 얻고, 스스로를 벼리고 있는 것이다. 그 에너지로 영화를 하는 것이고.

◆영화 ‘두 사람이다’ 70대 노인역..매일 종묘로 출퇴근

8월 개봉하게 될 오기환 감독의 공포 영화 ‘두 사람이다’에서 젊은이에서 70대 노인으로 분하는 김성준. 그는 요즘 매일같이 종묘에 나간다.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노인들의 발걸음을 따라다니며, 맞대면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때 만큼은 그도 노인인 것이다.

연기에 대해 한 마디 부탁하자 할 말이 많은 듯 뜸을 들인다. “내적인 것을 더 말하려 해야 해요. 외적인 것은 맨 마지막 일이거든요. 자신의 내면에 담긴 것을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죠. 빙산 아래 거대한 뿌리가 있는데, 그 부분을 많이 파 봐야지만 솟구쳐 오른 빙산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거든요. 모든 것을 다 보려고 하고, 인간의 양면성이나 정 반대의 행동도 생각해 봐야 해요. 한 곳에 꽂히면 나머지는 볼 수 없거든요. 그러나 막상 연기에 들어가서는 다 버리는 것. 결국 (연기는) 끝없는 연구 인 것 같아요.”

아버지의 그늘이 부담스럽지 않았냐고 하자 “그저 아버지 평생 걸어오신 길에 누 끼치지 말고, 제 색깔대로 열심히 해 보자는 생각 뿐입니다. ‘피’라는 것 ‘끼’를 물려받았다는 것이 분명히 있겠지만, 제가 연습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으면 아버지라 해도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니까요”라며 스스로 서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확인시켜줬다.

그러고 보니, 그가 소극장을 2003년 처음 열고 초연했던 작품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다.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 때 김성준은 평생 해 보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과 비밀 이야기를 귀엣말로 했다고 한다. 그것이 무슨 말이었을지 심중에 와 닿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