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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판 최부자'로 불린 우석 김종익 선생은…

박대성 기자 기자  2015.05.14 16: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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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일제강점기 교육인재 양성을 위해 5000억원을 내놓은 '참 스승'이 고향 전남 순천에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순천시에 따르면 주인공은 월등면 대평리 출신 우석(友石) 김종익(1886~1937) 선생. 김 선생은 일제강점기 교육사업가이자 대지주로 지역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김 선생이 지역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이유는, 부친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갑부'였음에도 지역사회와 어려운 이웃에게 환원했다는 점이다.

서울(경성) 중동학교와 1931년 일본 명치(메이지대학)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우석 김종익 선생은 이재에 밝아 물려받은 재산을 미두거래(요즘 주식거래)에 투자해 큰 수익을 거뒀다.

1933년에는 조선제사(朝鮮製絲)를 인수해 자본금 100만원의 대기업으로 회생시키는 등 사업가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1937년 숨을 거둘 당시 유언을 남기고 천문학적인 액수인 전재산 175만원,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5000억원 정도에 달하는 금액을 지역사회을 위해 내놓고 임종했다.

우석 김종익선생이 이렇게 민족의식 계몽에 눈을 뜬 계기는 명치대 유학 시절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인촌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김양수 등과 사귀면서 점차 애국청년으로 변해갔으며, 일제치하 조국의 미래는 교육과 식산(殖産)에 달려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불린 재산으로 우석대 전신인 서울혜화동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 고려대와 합병)'와 부속병원을 세웠고, 순천공립중(순천중)과 묵초육영회, 순천여학교(순천여중), 순천농업학교(현 순천대)에 토지를 기부하고 학교를 세운 보기드문 향토 육영사업가다.

1935년께는 소작농들이 흉년으로 생활이 어렵게 되자 몇년간 면민들의 호세를 대신 납부해주기도 했다. 그의 기부관은 이랬다.

"사람은 먹을 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여재는 사회공익 사업에 쓰는 것이 사회인으로서의 마땅한 의무이다"

우석 선생의 기부정신은 오늘 날 순천이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유지하는데 우석 선생이 가장 큰 밑거름이 됐다는 점이 후세의 평가다.

순천고와 순천여고, 그리고 올 해로 개교 80주년을 맞은 국립순천대학교를 키운 공헌을 세워 지역민들은 우석 선생을 지금도 못잊고 있다.

김종익 선생은 특히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일군 부친(김학모)과는 달리 '정승같이 돈을 쓴'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육영사업가로 평가 받는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나 럭기금성(현 LG) 구인회 같은 경상도 부자들은 6.25 이후 부를 축적한 신흥갑부였지만,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는 일제 때도 '만석군'이 꽤 많았다.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하지만, 전 재산을 내놓는 '통큰' 부자는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석 김종익 선생은 오늘날 되돌아 볼 때 선각적 리더로 꼽힌다.

우석 선생은 사회복지 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적십자사와 나병협회 등에 거액을 희사했다. 우석 선생은 1937년 51세의 일기로 타계할 당시 유언장에 이렇게 남겼다고 전해진다.

△불우한 한국 학도들에게 학비를 대줄 것 △순천농업학교를 갑종(甲種)학교로 승격시킬 것 △순천 남녀고교를 설립해 줄 것 등이다.

이러한 우석 김종익 선생의 사회공헌 내막은 300년간 '부자의 품격'을 보여준 경주 최부자집(최준 선생)과 종종 겹쳐져 투영된다.

1947년 대부분의 재산을 '대구문리과대학(영남대 전신)'을 끝으로 부를 환원한 경주 최부잣집의 정신이 깃든 '육훈(六訓)'과 '육연(六然)'과 견주어 그 정신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순천의 후학들은 우석 김종익 선생을 기리기 위해 사후에 순천대와 순천고, 죽도봉에 동상과 기념비를 세워 그를 잊지 않고 있다.

순천시에서도 우석 김종익 선생을 '5월의 인물'로 선정하고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 '어린이 날'에는 팔마보조경기장에서 우석 김종익선생 사진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우석' 선양사업을 벌이고 있는 순천시 시민소통과 관계자는 "김종익 선생은 돈을 버는 목적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보다는 조선의 사회와 민족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던 인물"이라고 되새겼다.

이어 "순천에 이런 훌륭한 인물이 있다는 점은 대단한 자랑거리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도 그의 공로를 널리 알려나갈 계획이다"고 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