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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해부] 세아그룹 ① 태동과 성장… '창조·혁신' 반세기 건실한 역사

전진·후퇴 반복 조바심 내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국내 특수강 1위 '굳건'

이보배 기자 기자  2015.04.28 09: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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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산업을 이끄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파악해보는 특별기획 [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세아그룹 1탄 태동과 성장에 대해 살펴본다.

1960년 10월19일 부산 감만동에서 세아그룹의 모태인 '부산철관공업'이 공식 출범했다. 부산철관공업의 설립은 '기업 하나하나가 우량기업으로 성장하면, 사회가 발전하고 국가가 발전한다'는 사업보국의 창업정신에 기초한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통해 나라의 부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절감한 해암 이종덕 창업회장의 신념에서 탄생한 부산철관광업의 특징은 당시 유행어처럼 번지던 '한국' '세계' '아시아'와 같은 거창한 이름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산'이라는 출발지명을 사용해 '사업보국'과 '초석기업을 세운다'는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겠다는 사업의지를 분명히 했다.

◆한국 강관공업 요람…도전과 약진 

부산철관공업 부산공장은 세아의 발상지이자 한국 강관공업을 일으킨 요람이다. 부산철관공업은 짧은 기간 많은 기술적 성과를 거두며 1965년 한국공업규격표시허가(KS) 및 한국선급협회표시허가(KR)를 획득, 강관업계를 선도했다.

또 이를 발판으로 해외에 눈을 돌려 창립 7년만인 1967년 미국에 10만 달러 상당의 제품을 수출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부산철관공업의 1960년대 가장 큰 변화는 기업공개 단행과 서울공장 건설이다. 기업공개의 개념조차 없었던 1969월 5월13일 과감히 주식을 상장함으로써 공개기업의 선두그룹에 오른 것.

이 같은 결단은 창업주가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기업들을 시찰하면서 "기업이 커지면 그 기업은 이미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고, 국민의 기업으로 공유돼야 하며, 한 개인의 자본만으로는 국민기업을 육성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데 따른 것이다.

이어 부산철관공업은 급증하는 수요에 부응하고 지속적인 수출과 시장 확대 방안으로 보다 양질의 다품종 대량 생산체제의 구축이 긴요하다는 판단 아래 1970년 서울공장을 건설했다.

이듬해 8월1일 회사 창립 11년 만에 부산시대를 접고 본사를 서울로 이전, 새로운 성장시대를 열었다. 이후 부산철관공업은 강관 종합메이커로서 면모를 일신하고자 1975년 5월 상호를 '부산파이프'로 변경했다.

부산파이프의 1970년대 특징은 오일쇼크로 내수시장이 위축된 가운데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전개해 성장의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대미 수출 증대에 힘입어 업계 최초로 쿠웨이트, 사우디, 이란 등 중동시장의 문을 열었고, 호주, 동남아시장도 잇따라 개척했다.

1970년대 중반을 지나며 포항공장 가동과 함께 유정용 강관을 개발하면서 대미 수출은 폭발적으로 증대했고, 이에 따라 1978년부터 5년 연속 수출산업 발전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이 100억 달러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종합상사가 아닌 단일기업이 단일품목으로 수출한 실적으로는 괄목할 만한 것이며, 강관업계로 볼 때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관업계 선두를 굳힌 후에도 증설은 계속됐다. 부산파이프는 1978년 10월 포항철강단지 내 약 3만3057㎡(1만평) 부지에 연산 24만 톤에 이르는 포항공장을 준공했다.

포항공장은 고급강관 생산을 위한 최신의 SRM(Stretch Reducing Mill)설비를 갖췄다. SRM은 사양에 맞게 구경과 두께를 조정하며 빠른 속도로 조관할 수 있고, 후육 고강도(厚肉 高强度) 강관의 제조에도 탁월한 성능을 지녔다.

◆1995년 본격적인 그룹 체제 IMF도 극복

1980년대 산업화의 급진전과 함께 용접재료의 수요가 높아지자 부산파이프는 1985년 한국알로이로드(세아ESAB)를 설립했다.

자력 생산 및 품질의 토착화까지 진통과 연단을 겪었지만, 질적 향상에 가열찬 노력을 기울여 1986년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 7대 선급 승인을 취득, 1987년 국내 용접회사로는 최초로 일본공업규격(JIS)과 한국공업규격(KS)을 획득했다.

여기 더해 부산파이프는 1988년 5월 자동차 부품 및 기계산업용 기초소재의 국산화를 위해 창원강업(세아특수강)을 인수했다.

포항공장을 중심으로 자동차, 기계, 건설용 볼트와너트, 스크류 등에 쓰이는 냉간압조용선재(CHQWire)와 마봉강(CD Bar)생산 가동을 앞두고 있던 부산파이프는 인수 당시 경영상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사화합에 주력하며 엄격한 생산관리와 설비투자로 시장에서 입지를 확보해 나갔다.

이런 가운데 21세기를 앞둔 1995년 본격적인 그룹경영 체제가 출발했다. 부산파이프는 1995년 1월1일부로 이운형 그룹회장을 추대하고 이순형 그룹 부회장을 선임해 21개의 계열사를 포용하는 그룹체제를 정식 출범시켰다.

1995년을 그룹화 원년으로 선언한 부산파이프는 1996년 1월 1일자로 그룹 명칭을 세아로 변경하고 새 CI를 선포했다. 동시에 세아의 '경영이념'과 '비전' '인재상'을 새로 정립했으며 '세상을 아름답게'를 세아가 지향하는 핵심가치로 설정했다.

하지만 세아의 그룹체제 출범 2년 만에 우리나라 경제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심각한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철강업계도 직격탄을 맞아 업계를 대표했던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명패를 바꿔 달았다.

사회 전반에 구조조정 칼바람이 부는 가운데 세아는 한 사람의 감원 없이 긴축경영과 사업합리화로 본연의 궤를 튼튼히 했다. 다양한 투자재원 확보 및 부실관계사나 사업부문의 통폐합을 추진하며 오히려 그룹 전체의 부채비율은 100% 이내로 탄탄한 재무구조를 유지한 것.

◆창조와 혁신…새롭게 탄생하는 세아그룹

2000년 세아는 서울 봉래동 신축사옥으로 이전하고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지주회사의 설립이다.

2001년 7월 경영자원의 집중화와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세아제강을 제조(세아제강)와 투자(세아홀딩스) 전문회사로 분할했다. 새롭게 탄생한 세아홀딩스는 공정거래법상의 지주회사로, 자회사에 대한 사업전략 수립 및 경영지원과 함께 미래 투자기회를 발굴하는 견인차 역할을 맡았다.

세아홀딩스가 이룩한 획기적인 업적은 기아특수강(세아베스틸)의 인수다. 세아홀딩스는 예비협상대상자의 자격임에도 선택과 집중의 전략으로 2003년 법정관리 중이던 기아특수강 인수에 성공, 세아그룹을 재계 40대 기업군 지위에 올렸다.

세아는 기아특수강 인수와 동시에 집중적인 투자와 합리화를 단행하며 생산능력을 꾸준히 키워 2014년 매출액 약 2조7000억원에 달하는 그룹의 핵심기업으로 끌어올렸다. 현재 세아베스틸을 비롯한 세아 특수강 계열사는 국내 특수강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한편, 특수강 분야에서 탄소합금강 생산에 집중했던 세아베스틸은 지난 3월 포스코특수강(현 세아창원특수강)을 인수해 특수강 분야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폭넓게 갖췄다.

탄합강에서 STS 봉강, 선재, 공구강에 이르기까지 고객에게 토털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세계 유일 특수강 기업으로 우뚝 선 세아그룹은 계열사 간 강점을 활용하고 시너지를 극대화해 글로벌 종합 특수강 리딩기업을 향한 힘찬 도약을 계속할 것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