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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해부] 삼성그룹 ① 태동과 성장…고비마다 '신경영'마인드 돌파

반도체 투자 비롯 과감한 미래 전망·도전으로 초국적기업군 성장

임혜현 기자 기자  2015.04.26 09: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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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산업을 이끄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파악해보는 특별기획 [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삼성그룹 1탄 태동과 성장에 대해 살펴본다.

'삼성상회'가 설립된 지 77년, 이제 삼성은 우리나라 경제를 견인하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물론 글로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국적기업군이 됐다. 
 
삼성그룹은 1938년 설립된 무역회사 삼성상회에서 비롯됐다. 삼성의 창업주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친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은 1938년 3월 대구 서문시장 근처 지상 4층, 지하 1층의 목조 건물에 회사를 세웠다.

일제시대라는 상황 속에서 삼성상회는 청과물과 건어물을 중국과 만주에 수출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았다고 알려진다.

3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내고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숫자다. 또 성(星)은 별이라는 본래의 뜻 외에도 밝고 높으며 깨끗이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
 
호암은 대구의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1948년 상경, 삼성물산공사를 차렸다. 1950년 동란이 터져 용산·인천에 있던 삼성물산공사의 재산이 큰 피해를 입어 사업이 공중분해되는 듯 싶었지만, 대구의 삼성상회를 맡았던 이들이 호암에게 그간 번 돈을 내놓으면서 재기를 촉구해 권토중래를 기약하게 된다.

이후 1953년에 설탕을 만드는 제일제당, 이듬해 제일모직이 설립된다. 1960년대까지 원사와 모직물 생산에 전념하던 제일모직은 1970년대 화학섬유사업, 1980년대 패션사업에 진출하는 등 삼성의 전방위 사업 확장 역사에서 대들보 역할을 했다.

호암의 기업가 정신은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큰 전기를 맞게 된다. 1966년 9월 터진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는 등 시련도 있었지만,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 육성 등으로 국가 경제규모가 커지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호암은 전자산업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 원동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이것이 주효해 오늘날 거대기업군인 삼성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기업역사 서막 '반도체' 애니콜부터 갤럭시 S까지

1969년 1월 설립된 삼성전자공업(이후 삼성전자로 개칭)은 당시만 해도 금성사가 독주하고 있을 뿐더러 수요가 일천하다는 한계가 컸던 한국 전자시장의 현실에도 기술력 확보에 나선다. 이에 따라 흑백 TV를 파나마에 수출했고, 77년에는 컬러 TV를 수출하는 등 전자산업의 역사에 주요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한다.

1974년 삼성은 한국반도체의 지분을 50% 인수한다. 현재 삼성을 이끌고 있는 이 회장이 사재를 털어 투자한 것.

이때부터 삼성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고 1983년 12월 64K D램의 생산에 성공했다. 이후 1984년 삼성반도체 기흥 공장 건립, 1993년 6월 세계 D램 업계 최초로 8인치 양산라인을 준공 등으로 이어졌다.

미국과 일본 등 반도체 선진국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기우를 불식시킨 것은 물론 오히려 현재는 세계 반도체업계를 주도하는 위치로까지 올라섰다. 창업 회장인 호암의 타개로 1987년 이건희 체제가 출범한다. 그는 회장 취임사의 제일성으로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다짐의 결과 이 회장 취임 후 삼성그룹의 매출액은 40배, 자산은 50배 이상 늘어나는 등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매출액은 330조원, 자산은 560조원 규모다. 호암은 기업가를 '창조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도전과 창조를 강조했다.

그는 '호암자전'에서 "기술의 혁신과 그로 인한 산업 구조의 변화에 기업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이 구조 혁신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활력 있는 기업은 시대를 선행해 그 수명이 연장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시대의 진운에서 탈락되고 만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 같은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이 회장 역시 도전과 혁신을 늘 염두에 두고 삼성이 '고인 물'이 되지 않도록 했다는 평을 듣는다.

1993년 "처자식 빼고 모두 다 바꿔라"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신경영'의 초석을 놓은 그는 1995년 애니콜을 내놓으면서 휴대전화 단말시장에 도전했다. 이후 '마하경영'까지 늘 새로운 화두로 삼성그룹은 물론 재계 전반에 긴장감과 신선함을 불어넣어 왔다.

2014년 한 세미나에서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프랑크푸르트 선언 그리고 신경영에 대해 △기존 경영 관습에 대한 철저한 자기부정 및 △양 위주에서 질, 즉 수익 위주의 경영으로의 전환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애니콜에서 태동한 휴대전화 단말은 스마트폰이라는 시류에 적극적으로 조기에 대응한 데 힘입어 갤럭시 시리즈의 안착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갤럭시 대성공으로 삼성전자가 그룹 전체 당기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13년 74.2%까지 치솟은 바 있다.

◆삼성 성공요인? "일본, 미국 장점 접목" 학계 호의

1997년 연말 외환위기 무렵의 자동차 투자 실패,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비자금 관련 양심선언 등 '이건희 체제'의 독선과 부정적 영향에 대한 징후도 없지 않았으나 이 회장은 잠시 경영일선에서 머물렀다 복귀하면서 '마하경영'을 제시했다.
 
이 같은 성공에 대해 송재용·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2011년 7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서 과거 삼성은 전통적인 일본식 경영 시스템을 받아들였으나 1993년 신경영 도입 이후 미국식 경영을 적극 접목하면서 두 가지 경영의 장점을 합친 삼성식 경영을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3년 만에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은 강력한 스마트폰을 만들 것을 주문했고 2010년 6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 S'가 세상에 등장하게 됐다.
 
이제 삼성은 '패스트 팔로워' 전략으로 선진 메이커들을 추격하던 데 그치지 않고 새롭게 시장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근래 스마트폰 실적 정체를 겪은 점도 이 같은 위상 변화에 따른 상황 수습과 몸만들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와병 중인 이 회장을 이을 장남 이재용 부회장 시대가 열리느냐의 구도로만 풀이할 것은 아니라는 분석인 셈이다.

늘 혁신을 강조해온 삼성이 드디어 혁신 아니면 살 길이 없는 '퍼스트 무버'가 된 지금, 그간 고비고비를 헤쳐온 저력이 이번에 본격적으로 터질지 아니면 한계에 봉착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