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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컷] 한글의 아름다움 살아나는 세로쓰기

임혜현 기자 기자  2015.04.15 16:3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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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최근 어느 일식점 앞에 붙은 홍보문구가 눈길을 끌어 당겼습니다. 동일본 쓰나미 사태 이후 수산물 특히 일본산에 대해 방사능 우려가 높은 여파 탓인지, '일본산 수산물을 사용할 시 가게와 손목을 내놓을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나타낸 내용이었죠.

가게는 몰라도 손목은 받아서 별 쓸모가 없는데, 어쨌든 자신이 쥐는 스시에 대한 장인의 자부쯤으로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사실 손목보다 더 관심이 갔던 점은 "세로쓰기를 저렇게 해도 되는가?"라는 부분이었습니다. 불과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세로쓰기를 하는 신문이 남아있었는데, 세로쓰기를 할 때는 저 현수막과 달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행갈이를 해서 오는 방식으로 표기를 해 왔습니다. 아마 그런 방식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저런 왼쪽줄부터 먼저 적고 오른쪽 방향의 줄로 차차 적어오는 저 문장이 낯설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손목이 중요한 게 아니라구요.

한글은 가로쓰기가 현재 보편화돼 있고, 가로쓰기시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나갑니다. 나라와 문자에 따라 다르나, 영어권의 영문 표기가 많은 영향을 미쳐 세계 각국에서는 가로쓰기의 경우 우리처럼 '자횡서'를 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래된 사찰의 편액을 보면, 이와 달리 가로쓰기에서도 우측에서부터 좌측으로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웅전'이 아니라 '전웅대'식으로 썼던 것이죠.

이는 가로쓰기가 일반적이지 않고 세로쓰기가 원칙, 가로쓰기는 일부분 활용이던 시기에 가로쓰기의 원칙도 세로쓰기의 그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로쓰기시에는 행갈이를 우측에서 좌측으로 하는(종이에서 우측부터 첫줄을 쓰고 차차 왼쪽으로 이동해 오는 방식) 이른바 '우종서'가 일반적으로 쓰였습니다. 한국어·중국어·일본어·베트남어 등 한자 문화권의 언어는 전통적으로 우종서를 썼고, 그렇게 우측에서 좌측으로 진행되는 게 상식으로 돼 있었기 때문에, 간혹 간판과 같이 가로쓰기를 해야 할 때에도 우횡서로 썼던 것이죠.

그러나 근대 이후 서양 문물이 동아시아에 전래하면서 좌횡서가 대세가 됐습니다.

문제는 세로쓰기는 아예 퇴출되다시피 했는데, 지금에 와서 예전엔 우횡서였으니까 저건 틀린 건지, 아니면 이제 그냥 편한대로 쓰면 되는지가 아리송한 영역에 남아있는 셈입니다. '엔하위키 미러'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세로쓰기를 할 땐 우종서를 원칙으로 하지만 경우에 따라 좌종서를 쓰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저 가게는 종북(?)일까요? 다시 엔하위키 미러에 의하면,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세로쓰기에 대해 더 이상 학교 교육과정에서 왈가왈부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쪽이 원칙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냐는 논조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고 보면, 저 세로쓰기 방식은 과거 옛날 신문과는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새롭게 멋부려 쓰는 방식으로 이미 생명력을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관점을 좀 봐꿔서, 그럼 왜 가끔 저렇게 멋부리듯 세로쓰기를 하는 광고 양식이 근래 눈에 띄는지에 대해서도 덧붙여 볼까 합니다. 이는 한글이 창제되던 시기엔 세로쓰기가 기본형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가로쓰기보다 오히려 세로로 쓸 때 한글로 적힌 문장이 조형미를 얻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즉 한글을 세로로 앉히고 읽었을 때, 가로로 배열한 경우보다 '초성>중성>종성'의 순차적 흐름이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아울러 현대적 의미에서도 세로쓰기를 다시 활용하자는 필요성을 거론한 연구도 없지 않습니다. 석상호씨는 기아차 선행디자인팀에서 일하던 중에 네비게이션에 세로쓰기로 정보를 담으면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을 내놔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제목 등 운전자석 주위로 흩어져 있던 정보가 화면 한곳에 위아래로 정갈하게 모여 있어 한눈에 보기 편하다는 의견이었죠. 그는 심지어 2011년에 이 문제로 한국디자인학회에 '세로쓰기를 적용한 하이브리드 유저'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세로쓰기로 문장을 나열해 놓으면 어쩐지 한글의 조형미가 살아나서 멋스러워 보인다고 하니, 앞으로 종종 저런 세로쓰기 홍보문구를 더 자주 접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먼저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방향은 오래 전 신문표기법과는 달리 우종서 일색에서 좌종서 허용으로 넓어지고 있으니, 다소 저 새 표기 스타일이 낯설다고 해도 '미적 허용'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