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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나의 길 아니다" 정치인 문재인이 걸어온 길

야권 대통령 선거 후보 역대 최고 득표수·득표율 기록

이금미 기자 기자  2015.02.08 22: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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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지난해 12월29일 문재인 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출마 선언을 했다.

"새로운 당으로 바뀌지 않으면 총선 승리는 불가능하고, 총선을 승리하지 못하면 정권교체의 희망도 멀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리고 2월8일 그는 제1 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됐다. '정치인 문재인'이 걸어온 길을 짚어본다.

◆가난…자립심과 독립심 키우는 데 도움

문재인은 1953년 1월24일, 경남 거제도의 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 작전 때 그의 부모가 피난을 와서 정착한 마을이었다.

그의 부친은 함흥농고를 졸업하고 흥남시청 농업계장도 지냈지만, 피난지 거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포로수용소의 노무일뿐이어서 늘 가난했다. 그리고 문재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의 가족은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사라호 태풍이 몰아치던 날, 거센 바람에 허술한 지붕이 홀랑 날아가 뻥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일, 형편이 안 돼 자전거를 타지 못하던 일, 어머니가 하는 연탄 배달을 돕다가 리어카와 함께 길가에 처박힌 일 등이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이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당시 가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부딪히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 배치

문재인은 부산의 명문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사학과를 가기에는 '점수가 아깝다'는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반대 때문에 결국 법대를 선택한다. 재수 끝에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해가 1972년, 그해 10월에 '유신'이 선포된다.

이 무렵 그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의 은사'를 만났다. 그 시절의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그 인물은 고(故) 리영희 선생이었다.

1974년 문재인은 유신 반대 학내시위를 주동한 일로 구류를 살고 나와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의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한 바로 다음 날 대규모 학내 시위를 이끌어 이 일로 구속이 된다.

문재인의 군대생활은 이미 많이 알려졌다. 석방 후 날아온 신체검사통지서와 입영통지서가 단 하루 간격이었다는 것, 창원 39사단 훈련소에 입대해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이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이라는 것 등….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여단장 전두환 준장, 대대장이 장세동 중령이었다. 12·12 신군부 쿠데타 때 참군인과 반란군으로 나뉘어 정 사령관은 반란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전두환은 대통령까지 올랐다.

◆시위 전력 "판사 꿈 접고 변호사 길 걷다"

1978년 2월, 입대한 지 31개월 만에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복학의 길은 막혀 있었고 졸업장 없이 취직하기도 어려웠다. 그 와중에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불행이 겹쳤고 이때 회한은 그를 고시 공부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불과 몇 개월의 공부 끝에 1979년 초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다음 해 2차 합격을 목표로 정진하던 중 10·16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곧이어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졌다. 1980년 학교로 돌아간 문재인은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중심에 섰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고시 공부는 뒤로 밀렸고 5·17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는 날 다시 구속됐다. 당시 문재인은 5월15일 서울역 앞 시위 때 발생한 경찰 사망사건의 참고인 조사를 계속 받느라 군사재판에 넘어가지 않고 미결로 남았었다.

이때 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고 이 시절에 7년 연애한 김정숙씨와 결혼도 했다.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고승덕 전 의원 등 연수원 동기들 사이에서 문재인의 성적은 뛰어났다. 그는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마쳐 수료식 때는 법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다만 판사를 지망했음에도 시위 전력 탓에 임용은 되지 않았다. 대형 로펌의 스카우트 제의를 뒤로 한 문재인은 그가 그렸던 '보통 서민들이 겪는 사건들 속에서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노무현 변호사와의 운명적 만남

노모도 모실 겸 부산행을 결심하는데 그렇게 해서 노무현 변호사와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깨끗한 변호사'가 되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친구처럼 함께 일하며 신뢰를 쌓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둘의 사이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두 사람의 법률사무소는 인근의 울산 창원 거제 등을 망라하는 지역의 노동인권사건을 총괄하는 센터처럼 돼 버렸다. 자연히 재야운동에도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됐고 둘은 역할을 분담해 맡은 일을 억척스럽게 해냈다.

1988년 총선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국회의원이 돼 서울로 향한 뒤, 부산에 혼자 남은 문재인은 노 변호사와 함께 하던 일들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시국사건과 노동사건은 여전히 많았고, 법률사무소가 맡은 부산 경남지역의 센터 역할도 변함없었다.

특히 부산 노동문제연구소, 부산 노동단체협의회, 노동자를 위한 연대 같은 노동운동단체의 활동을 집중 지원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 일이 많았다.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국정 전반 풍부한 경험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문재인은 민정수석 두 차례와 시민사회 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면서 참여정부의 출범과 마감을 함께 했다. 초대 민정수석으로서 조각(組閣)에서부터 정부 초기의 여러 현안들에 깊이 관여했다. 고유 업무 외에도 노동사건과 갈등사안까지 담당해 늘 격무에 시달렸다.

특혜 같은 것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업무시간 외엔 직접 차를 몰았으며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비행기나 기차의 일반석을 이용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는 동안 문재인은 건강이 많이 상해 이를 10개나 빼야 했다. 결국 1년 남짓 만에 민정수석을 사퇴하고는 훌쩍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휴식도 잠시,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그길로 귀국한 그는 탄핵 대리인단을 구성을 비롯해 법적 대응 전반을 조율한다. 탄핵 재판이 마무리와 동시에 그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2005년 1월에 다시 민정수석에 자리한다.

2006년 5월 민정수석 사임 후 9개월여 휴식 끝에 2007년 3월, 그는 비서실장으로 다시 청와대의 부름을 받는다. 문재인은 마지막까지 현안을 꼼꼼히 챙기며 청와대를 지켰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정 전반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축적했고, 다양한 부문의 이해를 조율하는 균형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정치 입문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 과정에서 상주 문재인이 보여준 절제력과 의연함은 많은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어쩌면 이 일이 그가 처음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첫 사례인지도 모른다.

문재인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정치는 나의 일이 아니다"라고 자주 말했지만, 결국 현실 정치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명박 정권의 퇴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2012년 4월 부산 사상구에서 총선에 출마했다. 정치 신인이 부산에서 출마해 당선되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더 큰 정치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이후 마침내 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불과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100만 국민이 참여한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이 정치 신인은 13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대통령 후보가 됐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에 성공했고 심상정 후보와 단일화 등을 이끌어 명실상부한 야권 단일 후보가 됐다. 그러나 18대 대선 결과 득표수 1469만표, 득표율 48.02%로 아쉽게 물러섰다. 문재인이 득표한 1400여만표, 득표율 48%는 야권 대선 후보 역대 최고의 득표수, 득표율이다.

대선 패배 뒤 문재인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국정원의 대선공작 수사,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논란, 세월호 참사 등을 겪으며 목소리를 높여왔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신임 당 대표 프로필

△1953년 경남 거제 출생 △1971년 경남고등학교 졸업 △1972년 경희대학교 법대 입학 △1975년 학생운동으로 투옥, 서대문 구치소 수감 △1978년 육군 병장(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 만기 제대 △1980년 경희대학교 법대 졸업 △1980 제22회 사법고시 합격 △1981년 김정숙 씨와 결혼 (슬하에 1남 1녀) △1982년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시작(인권변호사 및 시민사회단체 활동) △1995년 법무법인 부산 설립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부산 선거대책본부장 △2003~2005년 청와대 민정수석 △2004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2007년 청와대 비서실장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2010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1년 혁신과 통합 상임공동대표 △2012년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민주통합당 국회의원(부산 사상) △2013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 새정치민주연합 원전대책특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