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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심층분석②] 신격호 日 정계 커넥션 완성작 '팍스 롯데'

단돈 83엔으로 다다미 8장짜리 방에서 일군 매출 100조 신화

전지현 기자 기자  2015.02.05 15: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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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껌과 과자를 팔아 모은 돈으로 거대 유통 공룡 롯데를 만들었다'는 꼬리표는 늘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을 따라 다닌다. 신 총괄회장은 단돈 83엔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현재 한국과 일본 곳곳에 상당량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1941년 무단가출 청년 신격호는 도쿄 스기나미구(杉並區) 코엔지(高圓寺) 거리 연립주택 다다미 8장짜리 친구 자취방에서 거대한 장정을 시작했다. 그는 90세를 훌쩍 넘긴 고령이지만 여전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막강한 비즈니스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신 총괄회장은 재계의 살아 있는 신화로 비록 시작은 초라했지만 꿈과 열정은 훗날 한일 양국에 걸쳐 막강한 부동산 부를 축적하면서, 아울러 굴지의 그룹을 이끄는 '거인'으로 우뚝 섰다.

신 총괄회장의 성공신화에는 특유의 수완, 인맥과 함께 '부동산'이 있다. 특히 그는 일본 경우 금싸라기 땅으로 소문난 도쿄 일대 땅을 상당량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이야 도쿄 신주쿠(新宿)와 도쿄 롯데가 들어선 카사이(葛西) 지구, 도쿄만 입구의 요지 우라와(浦和) 일대 등이 번화가로 변했지만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과거에는 갈대와 잡초가 무성한 황폐한 땅이거나 저습지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반발로 조성된 특수 경기 속에서 큰돈을 벌기 시작한 신 총괄회장은 남들이 부동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그 시절, 황무지, 저습지 등을 형편이 닿는 대로 매입했다.

1960년대 들어 일본은 고도 성장기에 돌입했고, 시가지가 변두리로 확장되자 신 총괄회장의 땅은 신시가지 중심부가 됐다. 특히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대규모 토목 공사 과장에서 토사를 버릴 곳이 없어 애태우던 건설 토목 업자들은 신 회장 소유 저습지에 돈을 주고 흙을 버릴 것을 제안, 저절로 매립을 공짜로 하게 된다.

바로 부동산 미래를 내다본 '신의 한수'를 이미 반세기 전 신 총괄회장은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도쿄올림픽을 전후한 시기 신시가지에는 전철이 들어왔다. 신격호 소유의 땅들은 전철역 바로 이웃이 됐다. 이후 10여년 뒤 신 총괄회장의 선구안은 바로 서울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서울의 핵심 지역인 소공동 롯데타운, 잠실 롯데월드, 영등포 역사점 등이 전철역, 철도역 통로와 바로 연결되는 예에서 보듯 도쿄에서의 성공신화를 그대로 한국에 이식하게 된다.

◆한일수교 막후 조정자 '신격호'    

"신격호는 전철역이 들어올 만한 땅을 선택하는데 귀재며, 아니면 로비를 해서라도 자기 땅과 전철역을 연결시키는 일에 명수다."

1970년 후반만 하더라도 국내 재벌들 중에는 자기가 소유한 고급 빌딩과 전철 통로가 연결되는 것을 일부러 회피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지하철 통로와 이어 놓으면, 고급 건물의 품위를 손상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 총괄회장은 이미 일본에서 '지하철이 위력'을 경험했다.

신 총괄회장은 한국과 일본 우호를 열망해 왔다고 한다. 그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전 총리)내각 무렵부터 고노 이치로(河野 一郎, 경제기획청·건설부 장관 등 역임), 이시이 미츠지로(石井光次郎, 전 부총리) 등 정계 실력자들에게 접근,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 오랜 기간 정치자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신 총괄회장의 '거미줄 네트워크'는 훗날 한일수교정상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 2005년 한일국교정상화 40주년 비밀해제 된 문서를 살펴보면, 신 총괄회장의 역할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우리 정부의 공식 외교 문서인 '박정희 의장 방일 일정에 관한 외무부 보고'에 따르면, 당시 5·16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은 1961년 11월11일부터 12일까지 일본을 공식방문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11월12일 오후 5시40분부터 9시까지 이케다 하야토(池田 勇人, 58·59·60대 일본 총리) 총리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와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가지는 대목이다.

이들 두 총리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 괴뢰 정부인 만주국의 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들로 특히 기시 노부스케는 '소화의 요괴'라는 별칭으로 훗날 A급 전범이 되며, 현재 일본 아베 총리의 외조부이자 일본 우익의 최고 상징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무려 4시간에 가까운 박정희, 이케다, 기시의 회담에 바로 젊은 날의 신격호가 등장한다. 신 총괄회장의 일본 정치계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실세 권력인 기시 노부스케와 현직 총리를 대동한 이날 자리를 주선하고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음을 당시 기록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신격호는 기시와의 인간관계에 의해 인재 등용 면에서도 수확을 거뒀다. 훗날 일본 롯데에서 신격호 이외에 대표권을 가진 오직 한 사람이었던 마쓰이 지로를 영입했던 것.

세무 관련 출신인 마쓰이는 기시 파의 후계자였던 후쿠다 다케오(福田 赳夫, 1976~78년 총리 재임, 훗날 장남 후쿠다 야스오도 91대 총리를 재임하는 등 일본 대표 정치 가문) 당시 대장성(한국의 기획재정부 격) 장관의 추천으로 일본 롯데에 입문, 전무, 부사장을 역임했다.

후쿠다는 1929년 동경제대 졸업 후 대장성에 들어가 경제 관료로 엘리트의 길을 걸었고, 정계에 입문한 이후 중의원 의원 16선을 기록하면서 대장성 대신 등을 역임했는데, 신격호는 선거 때마다 상당한 정치 자금을 지원했으며, 주변 정치인들에게도 수시로 후견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의 주요 정계 인물과 친분이 있었던 신격호는 이런 인연으로 스스로 쌍방의 대표들을 합석시키는 일을 주선했던 것으로 보인다.

롯데제과 20년사를 살펴보면 신 총괄회장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한일 회담 양쪽 대표들과 안면을 트게 했고, 때로는 내 스스로 쌍방 대표를 한자리에 합석시키는 일도 주도했다"며 "그런 모임의 기회가 잦아지자 양국에서 어렵고 미묘한 일에 부닥치면 나를 통해 의견을 접근시키기도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한일관계 상징적 존재 '롯데'

신격호와 기시 노부스케와의 밀착은 일본 프로야구단 오리온즈 인수에서도 드러난다.

신격호가 나가다 마사이치가 운영하던 프로야구단 다이마이 오리온즈를 인수한 것은 1968년. 모기업인 다이에이가 경영위기에 직면, 구단 유지가 어렵게 되자, 나가다는 친분이 있던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에게 읍소하고 기시는 신격호에게 구단인수를 청탁했다.

신격호는 구단 경영의 문외한이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당시 6억엔이란 거금을 던져 이를 인수한다.

이후 일본 내수 시장에 가장 강력한 기업으로 떠 오른 롯데는 한일정상화 이후 다각적인 방법으로 한국에 고국 투자 명목으로 진출한다. 이후 한국 롯데 매출 약 90조원, 일본 롯데 약 6조원 등 무려 100조원에 가까운 매출을 기록하며 해방 이후 가깝고도 먼 나라인 두 나라에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으로 성공시켰다.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신 총괄회장의 인맥과 수완 그리고 비즈니스 전략 삼박자가 맞아 떨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신 총괄회장의 한국과 일본에 걸친 정계인맥은 지난 1990년 3월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개장식' 사진 한 장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사실 특정 기업 사업장 개장식에 등장하기에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거물들이 즐비 했다. 당시 박태준·김종필 민자당 최고의원, 신격호 총괄회장 부부,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부부, 김대중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등이 나란히 기념촬영을 했으며,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 위원은 당시 고르바초프를 만나기 위해 소련 방문 중이어서 참석이 불가했다고 한다.

신 총괄회장의 영향력을 살펴 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이자 훗날 어느 경제인도 이런 정도의 영향력을 보인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