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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정권창출 승리 DNA' 강점…정치 9단 박지원

고교시절 별명 '야당 총무' 뼛속까지 정치인…자타공인 민주당의 살아 있는 역사

이금미 기자 기자  2015.01.20 18: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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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입'으로 통했다. DJ의 대변인으로 4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최장수 대변인은 그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그는 민주당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후보로 나선 박지원(73) 의원의 이야기다. 당권에 도전하며 새 정치 역사를 쓰고 있는 정치 9단, 박지원은 누구인가.


◆"김대중·노무현 정권 창출 승리의 DNA 지녀"

"저는 1997년 정권교체와 2002년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승리의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지원이 지난 7일 새정치연합 당 대표 예비경선 연설에서 한 말이다. 예비경선을 통과해 2·8 전당대회 당 대표 경선에 도전하는 그는 "싸울 때는 제대로 싸우고, 양보할 때는 감동적으로 양보할 수 있는 강한 야당을 이끌 대표가 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정치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다. 이는 20일 전주에서 열린 전북 합동연설회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당 대표 후보 중 누가 정치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했습니까. 박근혜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되묻는 식으로 자신의 정치력을 자평했다.

박지원을 이야기하면서 DJ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야당 대변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DJ 시절 4년간 최장수 대변인을 지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오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매일 아침 어김없이 동교동에 도착해 6시30분이면 DJ와 마주했다. 당시 "박지원은 DJ가 눈을 떴을 때 부인 이희호 여사보다도 먼저 마주치는 사람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DJ는 박지원의 부지런함에 더해 지성까지 갖춘 이야기꾼 기질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해박한 DJ의 수준에 맞춰 세간 사정을 전하는 박지원의 이야기를 "재미있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의 입은 양날의 칼이었다. 대변인 시절 박지원에게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은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또 김종필, 김윤환, 김덕룡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비유에 능한 박지원의 주요 표적이 됐다.

◆DJ의 입…1983년 만나 끝까지 곁 지켜

박지원을 '정치 9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란한 말솜씨, 단순히 웃기기만 한 말이 아니라 상대를 긴장하게 하는 유머감각까지 갖췄다. 반듯한 신사의 생김새에 논리정연한 판단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DJ와 박지원의 인연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 DJ와 처음 만났다. 훗날 박지원은 이 만남을 '운명'이라고 했다. 박지원은 1983년부터 DJ를 모셨다. 처음부터 가까이서 모신 건 아니었지만, 1992년 대선을 앞두고부터는 늘 DJ 곁에 있었다.

DJ의 미국 망명시절, 박지원은 잘나가는 가발 사업가였다. 한국에서 맞춘 가발을 미국에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5공 정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경환씨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이후 DJ를 만나면서 경환씨와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박지원은 1996년 출간한 책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에서 "그렇게 총재(DJ)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느낀 점 역시 한마디로 '존경스럽다'는 말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끝까지 지근거리에서 DJ를 모셨던 박지원은 지금도 중요한 사안을 놓고 이희호 여사가 상의하는 최측근 인사로 꼽힌다. 

박지원은 DJ를 가까이서 모신 덕분에 고소고발도 많이 당하고, 감옥생활도 오래했다. 2004년 대북송금 사건으로 서울 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는 '시대의 살인마'라고 불린 유영철과 같은 '감방'을 쓰기도 했다.

◆육지 동경하던 진도 섬소년 '야당 총무' 꿈 이뤄

박지원은 좌익 독립운동가였던 부친을 일찍 여의고, 36세에 홀로된 어머니 밑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컸다. 어려서부터 늑막염을 앓았던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허약했다. 이 때문에 재수 끝에 단국대 경영학과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

소위 일류 대학을 나오지 않은 것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대학에서 공부해서 실력을 쌓은 그는 반도상사에 취직,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일을 맡게 됐다.

이후 동서양행 뉴욕 지사장으로 발령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형님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와 성공을 거듭했다. 마침내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뉴욕 한인 회장에 당선 되는 등 미국 교포 중 가장 성공한 기업인 반열에 오르게 된다.

육지를 동경하던 진도 섬소년 박지원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국회의원이었다. 중·고등학교 때까지 박지원의 별명은 '야당 총무'였다.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물었을 때 답한 것이 별명이 됐다.

야당 총무의 꿈은 2010년에야 이뤄졌다. 이명박정부 때 민주당의 원내대표를 지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박지원은 누구보다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는 국회의원으로 꼽힌다. 그의 나이 73세가 무색할 지경이다. 참여연대가 조사한 국회(상임위원회) 출석률을 보면, 지난 19대 때 88%를 기록했다.

◆자칭 '통합 적임자'…부정적 시각 먼저 걷어내야  

14대 전국구에 이어 18대 총선 때 다시 국회에 입성한 그는 최근까지 줄곧 지도력을 발휘해왔다. 2010년 민주당 원내대표, 2011년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서 19대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2012)까지 맡았다. 그가 '민주당'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는 가장 큰 이유다.

그리고 이제 당권 도전에 나섰다. 박지원은 일찌감치 양강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상대 후보 문재인 의원을 겨냥해 "친노·비노를 떠나서 당이 잘되는 길이 무엇인지 마음을 열고 상생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며 "전당대회는 당 대표를 뽑는 거지 대선 후보를 뽑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당 안팎에서는 '박지원 스스로 친노·비노를 떠나는 게 먼저'라는 의견이 많다. 그가 지역감정 문제를 지적할 때도 '호남이라는 지역감정을 가장 잘 이용하는 정치인은 박지원'이라는 평가가 이어진다.
 
정치 9단 박지원이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걷어내고, 스스로 내세우는 ‘통합의 적임자’로서 2·8 전당대회에서 새정치연합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