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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도약 시험대에 서다 '이인영'

불의 참지 못하고 부탁 거절 못하는 486 그룹 대표 주자

이금미 기자 기자  2015.01.19 17: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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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2000년 이후 386(30대·1980년대 학번·1960년대 생)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과거의 386은 486(40대)으로 불린다. 또 그 시간만큼 많은 486 정치인들이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그 와중에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486 정치인이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인영 의원(51)이다. 진보세대를 대표하는 얼굴로서 차기 당권 주자로 나선 정치인 이인영은 누구인가.

◆운동권 출신으로 지닌 자부심과 회의

1980년대 운동권 학생회장 출신이 주축을 이룬 486 정치인들. 이들은 한때 한국 정치의 희망으로 불렸다. 유권자들은 이들이 한국 정치를 한 단계 도약시킬 것이라 믿었다.

학생운동을 강력하게 이끌었던 것만큼 가능성도 컸던 이들이야말로 정치판에 흡수된 선배 운동권 세대들과 다를 것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세대로서의 힘과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486 정치인들을 둘러싼 정치 환경과 수준도 제자리걸음이다.

그나마 학생운동 시절의 경력과 명성에 걸맞게 왕성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486 그룹 대표 주자는 이인영이다. 1987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초대 의장을 지냈던 그는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연) 당 대표 후보로 나서 전국을 무대로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인영 역시 대부분의 운동권 출신 정치들이 그렇듯이 '운동권'이었다는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니고 있다.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을 기록한 '산티아고 일기'에선 그가 운동권 출신 정치인으로서 가졌던 자부심과 회의를 엿볼 수 있다.

"나는 비록 정치권에 들어왔지만 운동권 선배들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고개 숙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줄서려는 생각은 아예 버렸다."

"운동권 출신은 다 하나인줄 알았다. 그런데 다 달랐다. 전당대회 때마다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 움직인다. 누구는 누구의 계보라고 했다. 나는 김근태 선배의 계보였다. 나는 계보가 아니라고 해도 이미 그렇게 됐다."

◆김근태 "고생시켜 미안하다" 위로의 첫 마디

"그냥 내 맘은 역사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일관되게 김근태 선배를 지지하기로 했다. 김근태가 우리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김근태가 우리 역사라고 확신하니까!"

고(故) 김근태 의원과 이인영의 인연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감옥에 있는 동안 부친을 여읜 이인영은 임종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해 가을 감옥에서 나와 좌표를 잃고 방황하던 그에게 김성환 현 서울 노원구청장이 인재근 현 의원을 통해 고 김 의원을 소개한 것이 첫 인연이 됐다.

굳이 "혼자 찾아가라"는 선배의 말을 뒤로하고 서울 수유리 어딘가 광산슈퍼를 돌아 찾아갔던 길. 고 김 의원은 이인영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선배들이 잘못해서 후배들을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했다.

고 김 의원의 첫 마디는 이인영의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이차도 제법 나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형님이라 부르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인영은 그때 그 위로를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막내'라는 별칭…유년시절의 중요한 상징

이인영은 1964년 충주 용산동에서 태어났다. 나지막한 산과 과수원이 가까운 곳이다. 2남2녀 중 막내인 그에게 막내라는 별칭은 유년시절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다.

형과 누나들이 서울과 청주로 유학을 떠난 뒤 일요일마다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충주의 산과 강, 언덕과 개천들로 소풍을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성남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도 했지만, 초·중·고 시절은 평범한 학생에 가까웠다. 고등학교 점심시간에는 독서반에서 활동했는데 삼국지, 초한지 등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RCY서클 활동도 빼놓을 수 없는 학창 시절의 추억이다. RCY서클 친구들과는 지금까지도 우정을 나누고 있다.

이인영의 선친은 평생을 초등학교 평교사로 재직하며 정직을 몸소 실천해온 분이다. 언제나 따뜻한 품으로 온기를 전해주던, 정이 넘치던 모습은 그리운 선친의 자취이기도 하다. 평소 책을 가까이 하는 이인영의 몸에 밴 습관은 선친의 영향이 크다.

충주에서 초·중·고를 나온 뒤 고려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이인영은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세대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군사정권의 독재와 억압,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채 권력의 무력 아래 무너져 있는 대학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총학생회장, 전대협 제1기 의장까지 맡았다. 용납되지 않는 불의를 보면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다. 또 주변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도 한몫했다.

◆전직 초선의원 신분으로 최고위원 당선

이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에서 재야운동을 하다가 1999년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돼 당무위원, 청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00년 16대 총선 때는 서울 구로갑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2년 노무현대통령후보 선대위 인터넷선거특별본부 기획위원장을 지냈고, 2004년 구로갑에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열린우리당 열린정책연구원 부원장,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을 맡았다. 2010년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당선된 뒤 야권통합특별위원회 위원장, 4대강대운하저지특별위원회 위원장, 비정규직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야권통합후보 상임선대본부장 등을 지냈다.

2012년 총선 때 서울 구로갑에서 당선됐다. 그리고 지난 7일 새정연이 2·8 전당대회에 앞서 실시한 예비경선 당 대표 선거에서 본선 진출자로 결정됐다. 당초 당 대표 선거는 문재인-박지원 후보가 일찌감치 양강체제를 구축해온 만큼 나머지 1인이 누구냐에 관심이 모였었다.

이인영은 "당의 이름이 무엇이든, 대권주자가 누구이든 오직 우리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깃발만을 뼛속 깊이 새긴다"며 "중산층과 서민의 신뢰, 그것이 유일한 답이기 때문"이라고 지지를 호소하며 예비경선을 가볍게 통과했다.

따지고 보면 정치인 이인영이 지난 1999년 정치판에 발을 디딘 뒤로 이토록 국민적 시선을 끈 적은 없었다.

이를 두고 당 안팎에서는 "재선에 성공하지 못한 전직 초선의원 신분으로 최고위원에 당선됐던 경험이 이번 도전의 큰 자산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이와 관련, 문희상 새정연 비상대책위원장이 꼽은 잠룡으로서 이인영의 강점은 '역동성'이다.

486 그룹을 대표하는 맏형으로서 '제2 도약'을 준비 중인 이인영은 지금 시험대 올라서 있다. 운동권 출신이라는 제약을 뛰어넘어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있을지 2·8 전당대회 결과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