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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또다시 운명의 기로에 서다 '문재인'

2012년 48% 지지율, 100만표 차 석패…'배려·정직·원칙' 앞세운 휴머니스트

이금미 기자 기자  2015.01.15 19: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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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2012년 총선 때 부산에서 처음 당선된 정치 신인이 있었다. 그는 그해 야권 단일후보로 대선주자가 되어 국민 48%(1469만표) 지지를 얻었다. 약 100만표 차이로 낙선했으나, 짧은 정치 경험에 비해 그가 일군 성과는 컸다.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후보 문재인(62) 의원의 이야기다. '노무현의 그림자'에서 대권, 당권을 넘보는 거물로 거듭난 정치인 문재인은 누구인가.

◆'노무현의 그림자' 천직 변호사 정치판을 디디다

1인자 뒤 2인자 시절의 문재인 프로필은 이렇다.

경남 거제 출신으로 경남고를 졸업했다. 경희대 법대 졸업 뒤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 무렵 고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30여 년을 함께 지냈다. 인권·노동 변호사를 같이했으며, 노 대통령을 따라 청와대로 들어가 민정수석,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이후 낙향해 변호사 생활로 복귀했고, 노 대통령 장례 이후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여기까지 보면 문재인의 인생 자체가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 자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럼에도 문재인은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문재인은 2011년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는 정치에 나서라고 권유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도 그를 설득했는데, 정치를 말리기는 했어도 권유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2011년 12월 문재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당에 입당했다. 또 국회의원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평생 변호사를 천직으로 알았고, 정치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했던 문재인이 정치판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그의 프로필이 뒤늦게 다시 알려졌다.

문재인은 1975년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운동 출신으로 시위를 주도해 투옥됐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음에도 시위전력을 이유로 판사임용이 거부됐고, 이를 계기로 노무현 변호사와 동업,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87년 6월항쟁 때는 부산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을 맡아 주도적인 활약을 했다.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에는 김대중 대통령 묘역만 참배했다. 그는 헌화하며 "배운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문재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세 지도자와의 가슴 아픈 이별과 정당 입당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부산선대본부장을 할 때도 입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선대본부장을 맡았을 정도로 고집을 부렸던 문재인이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재인은 2011년 10월 재·보궐 선거 때 정치판 깊숙이 들어왔다.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박원순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선 것이다.

그는 혁신과 통합의 상임대표로서 사법연수원 동기인 박원순 변호사에게 직접 서울시장 출마를 권유한 장본인이었다.

2011년 12월에는 또 한 사람의 지도자를 잃었다. 문재인이 '선배'라고 부르던 고 김근태 의원이다.

문재인은 마지막 문병을 갔을 때 인공호흡기를 꽃은 채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내년 대선에 꼭 이겨야 한다"는 고인의 말을 유언처럼 받들었던 셈이다.

2009년부터 그해 말까지 문재인은 세 지도자, 노무현, 김대중 그리고 김근태마저 가슴 아프게 떠나보냈다.

지도자는 떠났지만 새로운 시민사회 세력이 하나로 뭉쳐 더 커진 민주당에 그가 입당한 것이다. 2012년 총선이 끝나고 대선 출마도 최종 결심했다.

힘겹게 현실 정치를 택한 문재인에게 대선 결심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다. 총선 출마 때부터 '시대가 요청한다면 피하지 않겠다'고 각오해 왔기 때문이다.

정치인으로서 보여지는 그의 매력은 한마디로 별로다. 연설을 잘 하지도 않고,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부산·경남 출신이지만 지역이 새누리당 정서 속에 있으니 지역 기반도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 문재인이 정당에 입당하기도 전에 '대망론'의 주인공이자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의 입으로 2012년 총선이나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적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문재인이 주목을 끌었던 이유는 노무현 후광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노무현의 계승자이자 노무현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정치인 문재인의 힘…내면에 숨겨진 인간적 면모

총선과 대선은 정치인 문재인을 단련시켰다. 노무현이라는 그늘에 가려져있던 그는 정치 입문 1년 만에 노무현의 그림자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정치인 문재인'의 힘을 내면에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에서 찾곤 한다.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도 201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당내 대권주자들의 장단점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문재인을 '휴머니스트'라고 규정했다.
 
당 관계자들도 '합리적이다, 신뢰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한다. '점잖은 신사'의 이미지도 빼놓을 수 없다.

참여정부 시절 갈등조정자로서 대권 주자 간 갈등, 개혁 드라이브가 반대에 부딪혔던 지점에 반드시 그가 있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경희대 법대 동기이자 치안정감 출신인 박종환씨는 친구 문재인을 "풋풋했던 대학시절이나 국민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박씨가 꼽은 문재인의 대명사는 '배려, 겸손함, 진정성, 도덕성,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집념과 용기, 친구에게도 예외 없이 원칙을 고수하는 철저한 원칙주의자' 등이다.

2012년 총선 때도 출마를 놓고 바로 대선 출마로 가야 한다, 비례대표나 당선이 쉬운 수도권지역에 출마해 전국 지원 유세를 다녀야 한다 등 여러 의견이 이었지만, 문재인은 '부산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당선돼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정치적 미래 염두에 두지 않겠다"며 당대표 출마

새정치민주연합은 대선 뒤부터 지도부가 수차례 바뀌며 갈등과 분열을 이어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의식한 듯 문재인은 2·8 전당대회 당 대표 선거 출마를 선언하면서 "정치적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겠다"고 했다.

통합을 주창했던 사람으로서, 통합의 성과인 새정치민주연합을 반드시 성공한 정당으로 만들겠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문재인은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실패한 대선 후보라는 아픔을 딛고, 당과 지지층에 다시 희망과 믿음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인지 결과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