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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미생 속 상사맨 비애, 증권맨이 알아요"

낮은 수수료 또 깎고 하청직원 부리듯 해도 "실적이 뭔지…"

이수영 기자 기자  2014.11.19 12: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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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우리 상사맨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데. 우리나라에 '맨'자 달린 직업 딱 두 개거든. 증권맨, 상사맨…" "둘 다 을(乙)이네!"

인기드라마 '미생'에 등장한 이 대사가 여의도 '증권맨'들의 마음을 뒤흔든 모양이다. 드라마 방영 이후 꽤 한참동안 만나는 증권사 관계자 중 열에 일곱쯤은 드라마 대사를 읊으며 '을의 비애'를 털어놓았으니 말이다.

관련기사를 꼼꼼히 살폈던 독자라면 고개를 갸웃할지 모르겠다. 올해 금융투자업계는 최근 2~3년간에 비해 먹고살만했다.

업계 구조조정 한파가 연초를 기점으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유가증권시장 기준 일평균 거래대금이 이달까지 4개월 연속 4조원대를 웃돌며 시장도 북적였다.

특히 지난해부터 신규상장 종목이 급증한 덕분에 증권사별로 상장주관과 인수업무로 대표되는 IB(기업금융) 수익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그럼에도 증권맨들은 '을'의 고단함에 허덕이고 있다. 시장이 북적일수록 '슈퍼갑(甲)'에 휘둘릴 일이 그만큼 늘었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수수료와 회사채 발행금리를 거의 '후려치기' 수준으로 제시하는데다 일부는 아예 머슴 부리듯 주관사 직원들을 볶아대 눈총을 산 탓이다.

소위 '갑질'로 불리는 행태는 대기업 계열사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일례로 올해 최대 공모규모를 자랑한 삼성SDS의 경우 인수단으로 나선 한국투자증권, 골드만삭스(이상 대표주관)를 비롯한 7개 증권사에 대해 이른바 '패널티' 방식의 수수료 지급 구조를 적용했다.

삼성SDS는 공모금액의 1%를 증권사 수수료로 지급하기로 했는데 이 가운데 0.2%는 '업무성실도'와 '기여도'를 고려해 깎겠다고 못 박은 것이다. 주관사와 인수단을 대행업체 취급했다는 볼멘소리와 더불어 이는 업계 초유의 사례로 기록됐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나마 수수료 1%를 보장해준 삼성SDS는 그나마 후하다는 평이 적지 않다. 1%는 공모주 시장에서 업계가 바라는 적정 수수료율이지만 실제 기업들은 이보다 더 낮은 수수료를 제시하는 것은 물론 사실상 '용역' 수준으로 직원들을 부리는 일이 왕왕 벌어진다는 얘기다.

한 증권사 기업공개(IPO) 부서 간부는 "삼성이니까 1% 수준을 맞춰준 것이지 요즘 주관사들 사이에서 '공짜로 머슴살이 한다'는 소리도 나온다"며 "거래소에서는 신규상장을 계속 압박하는데 증권사 입장에서는 수익에 그다지 도움도 안 되고 일손만 딸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상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관사 직원들이 해당 기업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숙식을 해결해가며 기업공개 과정을 준비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야속한 노릇이다.

이런 고단함은 IPO 부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회사채 발행을 다루는 채권자본시장(DCM) 부서도 상황이 열악하다. 일례로 올해 7월 회사채 발행을 추진한 롯데케미칼은 주관사단에 0.09%의 수수료를 제시했다.

이는 10대그룹 계열사 중에서도 최저 수준인데 롯데 측은 일본계 자금을 스스로 동원할 수도 있다며 '헐값 수수료'를 밀어붙였다. 같은 계열인 롯데쇼핑과 롯데푸드, 롯데알미늄도 0.1~0.15%의 업계 평균대비 낮은 수수료를 지급했다.

KT는 지난 9월 4000억원대 회사채 발행 과정에서 개별 증권사별로 모집 가능 금액을 명시하도록 종용했다. 해당 금액만큼 모으지 못하면 패널티를 주겠다는 의미였다. 올해 5월 IPO 시한이 만료된 산은금융지주는 아예 주관사 직원들이 쓰던 책상 값을 해당 증권사에 물리는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가 주관사 타이틀을 따내기 위한 증권사끼리의 과열 경쟁 때문이라는 시선이 짙다. 증권사 스스로가 '을의 비애'를 자초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자본시장 선진화를 명목으로 한국거래소를 비롯한 당국이 실적에 따라 증권사들을 줄 세우는 상황에서 업계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결국 고객인 기업들이 하청업체 길들이기식의 잘못된 관행을 먼저 깨야한다는 얘기다. 비록 실현 가능성은 희박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