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산업을 이끄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파악해보는 특별기획 [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한화그룹 1탄 태동과 성장에 대해 살펴본다.
해방 이후 1952년 10월9일 현암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는 자본금 5억원을 들여 조선화약공판을 인수, 복구해 새로운 회사 법인으로 한화그룹 모태인 한국화약을 부산에 설립했다. 이후 김 창업주는 3년여의 전쟁이 휴전협정 조인으로 끝나자 본사 서울 이전을 통해 전국에 산재한 조직을 재정비하는 등 전후 복구사업에 따라 화약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에 대비했다.
◆한국화약 설립, '한국 다이너마이트' 산증인
김 창업주가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된 것은 1955년 어느 날이었다. 강성태 당시 상공부장관을 만난 김 창업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받았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도 화약공장이 있는데 왜 화약을 만들지 못하느냐. 하루 속히 화약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김 창업주는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혼신을 다했고, 1958년 결실을 맺었다. 대한민국은 그해 6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는 나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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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암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는 일찍이 화약사업의 가능성을 점치고,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다이나마이트를 생산했다. ⓒ 한화그룹 |
1970년대 한국화약은 1972년 방위산업에 진출하게 되고 정밀화학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면서 설비의 새로운 증설이 이뤄졌다. 인천공장에는 생산 2부를 발족, 방위산업용 특수폭약 제조시설을 갖췄으며 국방과학연구소와 고폭탄유의 공동개발에도 들어감으로써 고폭탄류 양산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이어 1970년대 말에는 자동화계획이 수립되면서 자동화기기를 도입, 제품 제조공정에 변화를 줬다. 1968년에는 방위산업 전문화를 위한 제2공장 여수공장을 신축하고, 특수 방산제품을 양산해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특수화약부문의 국내수요와 제2공장의 생산제품 및 원료를 충당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로 인해 한국화약은 1978년 250억원의 매출 중 약 3억원의 순이익을 냈고, 1979년 매출 318억원(순이익 6억원), 1980년 매출 516억원(순이익 14억원)의 성장세를 보였다. 특히 1981년 기준 한국화약의 경영규모는 자산 768억원, 자본금 60억원, 매출 671억원, 순이익 71억원으로 1980년대 성장의 발판을 다지게 됐다.
그런가 하면 한국화약은 일찌감치 인수합병(M&A)을 통한 성장을 모색했다. 1964년 1월 이미 기존 주력 사업 분야와는 무관한 신한베아링공업을 인수, 기계공업분야로 비관련 다각화를 시작했다.
1967년 즈음 한국화약이 PVC공업에 진출하면서 승승장구하던 한국화약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1960년대 초 한국화약은 김 창업주의 지시로 석유화학분야 진출을 모색, 1964년 11월 나프타 분해시설을 비롯해 석유화학계역 공장을 망라한 석유화학 사업계획을 완성했다.
그러나 한국화약의 석유화학 진출을 꺼린 정부와 출혈경쟁, 원료 폭등, 경기불황까지 겹치면서 자금회전마저 어려워졌다. 결국 부도어음이 쌓이게 됐고, 이런 시련은 1967년부터 1972년까지 5년간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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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화그룹의 모태인 한국화약 인천공장 1955년 모습. ⓒ 한화그룹 |
이런 상황에도 김 창업주는 특유의 강한 의지와 집념으로 이 시기를 극복했다. 1968년 1월 제3정유공장 운영권을 따냈고, 그해 11월 에너지사업 총괄법인 '경인에너지개발주식회사'를 발족, 이듬해 3월 사명을 '경인에너지주식회사'로 변경하면서 민간 정유시대 깃발을 올렸다. 이후 업종별 계열사 구조도 크게 진전됐다.
1981년을 기준으로 모기업인 한국화약을 비롯해 △기계(한국베아링공업, 한국정공) △석유화학(한국프라스틱공업, 유니온포리마, 경인에너지, 제3석유판매) △무역(골든벨상사) △건설(태평양건설, 태평양엔지니어링, 김포요업) △관광·서비스(태평개발) △금융(제일화재해상보험, 제일증권) △식품(대일유업) △전기·전자(고려시스템산업) △운수(성운물산, 삼희통운) △육영(천안북일고) 등으로 다각화한 것.
◆젊은 총수 등장, 제2의 전성기 '승승장구'
1981년 한국화약에 새바람이 불었다. 그해 7월 김 창업주가 갑자기 타계하면서 김승연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았고 당시 그의 나이 29세에 불과했다. 갑작스런 젊은 총수의 등장에 주변의 시선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 경영권을 이어받은 김 회장은 사업다각화와 성장 위주의 기업경영을 통해 한국화약 계열기업군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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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화약을 시작으로 60년의 역사를 가진 한화그룹은 재계 11위까지 올랐다. 장기간 지속된 법정공방으로 인한 오너 부재로 성장에 잠시 제동이 걸렸으나 새로운 도약이 기대된다. 사진은 한화그룹 장교동 본사 사옥. ⓒ 한화그룹 |
1981년 당시 한국화약그룹은 계열사가 15개, 총 매출액은 1조600억원이었다. 김 회장 취임 이후 1982년 단행된 한양화학 인수 때,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의 적자는 각각 80억원, 430억원으로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게다가 세계적 불황으로 석유화학 업종의 전망이 불투명했고, 일본의 석유화학만 해도 이미 사양길에 들어섰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다우케미칼의 한국 철수 의도는 본사의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하려는 해외 자산 처분계획의 일환이며, 결코 석유화학의 장래가 어두운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 한양화학을 인수했다.
이 시기 한국화약은 김 회장 취임 4~5년 만에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1980년 그룹 매출 7300억원 규모였던 그룹 매출은 1984년 3배 증가한 2조1500억원으로 뛰어올랐고, 이 매출 가운데 김 회장의 결단에서 이뤄진 한양화학과 경인에너지의 매출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이로써 한국화약그룹은 1985년 대한민국 재계 7위로 부상했다.
이러한 고도성장과 함께 1992년 10월 한국화약은 그룹의 경영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그룹 명칭을 '한화그룹'으로 변경했다. 모기업인 한국화약을 (주)한화로 바꾸고 새로운 CI도 만들었다. 1994년 10월에는 계열사의 상호에 '한화'를 사용해 그룹 이미지를 통일했고, 1995년 계열사를 축소해 5개 소그룹제로 개편함으로써 (주)한화 화약부문은 무역, 정보통신, 건설 등과 함께 그룹의 중핵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화그룹의 2000년대는 도약기라 할 수 있다. 금융, 유통 분야의 발전이 그룹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먼저 2000년 3월에는 벤처기업 투자를 적극 추진하기 위해 한과증권과 한화석유화학 등 그룹의 주력기업과 일본 CSK가 합작투자 한 한화기술금융을 설립했고, 2001년 3월 전문성을 갖춘 조직을 분리해 국내외 유수업체와의 전략적 제휴나 자본유치로 IT전문기업을 육성한다는 정책 아래 (주)한화 정보부문을 분사시켜 한화 S&C를 설립했다.
2002년에는 사업구도가 혼재해 있던 (주)한화를 (주)한화, 한화건설, 한화기계로 분리하는 물적분할을 실시, (주)한화는 화약 및 연관 우주항공, 미사일 정밀유도 무기사업과 무역부문을 포함하게 됐고, 한화건설과 한화기계는 기계부품 전문회사로 재탄생했다.
같은 해 대한생명 인수도 빼놓을 수 없는 이슈다.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가격결정에 있어 세 차례의 인상이 있었지만 한화그룹은 대한생명 인수를 통한 그룹의 미래비전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고 가격산정에 합의했다.
이때 김 회장은 대한생명 인수와 동시에 대한생명 경영이 정상화될 때까지 무보수 근무를 선언하며 책임경영에 대한 자신감과 의지를 보이며 인수에 성공했다. 2012년에는 대한생명에서 '한화생명'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제2의 번영기를 맞이하는 중이다.
◆제동 걸렸지만…화학·태양광·첨단소재로 '도약' 꿈 꿔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한화는 활발한 해외시장 진출을 앞세워 글로벌 선도기업으로 다시 한 번 도약하고 있다. 이 중 눈길을 끄는 것은 2012년 독일 태양광 기업 큐셀을 인수해 한화큐셀을 출범시킨 것과 이라크 신도시 건설과 관련, 대한민국 사상 단일 최대 건설공사를 수주한 것이다.
물론 일련의 과정에서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7년 김 회장은 둘째 아들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은 바 있다. 이와 함께, 2011년에는 부실 계열사를 구제하기 위해 우량 계열사 자산을 동원하고, 특정 계열사 주식을 가족에게 헐값으로 넘기는 등 회사에 수천억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 등에 따라 불구속 기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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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시간 법정공방으로 총수 자리를 비웠던 김승연 회장이 지난 2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29세 젊은 나이에 그룹을 물려받아 꾸준한 성장을 이뤄낸 김 회장의 다음 도약이 궁금하다. ⓒ 한화그룹 |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결과 지난 2월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오랜 수감생활 결과, 건강상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김 회장은 현재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고 서울 소재 사회복지기관에서 8시간씩 주2회 봉사활동을 이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한화그룹은 최근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건자재, 제약 부문은 팔고 석유화학과 태양광, 첨단소재 사업을 키우는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주력사업 재편에 나선 것. 장시간 자리를 비운 김 회장의 공백 속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진 한화그룹의 승부수가 통할지 재계 이목이 집중된다.
총수 부재라는 악재 속에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한화.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 장남 김동관 한화큐셀 실장이 이끄는 태양광 사업은 이미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1980년대 젊은 총수의 위력을 보여줬던 김 회장의 빠른 경영 복귀와 함께 한화의 끊임없는 혁신과 발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