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서울의 북촌은 요즘 인사동을 능가하는 인기 관광지이다. 그런데 북촌은 대한황실사와도 깊은 관련성이 많이 있는데 거의 잊혀진 상태에 있다. 오로지 관광객들은 예전 조선 시대의 전형적 모습을 보이는, 외형적인 북촌 생활문화에만 관심이 크다. 아름다운 기와집 한옥에만 눈길이 집중되는 평범한 관광만 한다.
북촌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현재의 풍문여자고등학교 터는 원래 안동별궁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안동별궁은 사라지고 풍문여고가 대신하고 있다. 이렇게 별궁이 사라진 역사는 일제침략의 잔혹함을 원색적으로 보여준다.
이토록 가슴 아픈 일제침탈사 현장은, 대한황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치열한 항일투쟁을 했던 의왕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그 누구도 역사의 현장이란 생각이 없이 덧없이 살 뿐이다.
의왕은 일제강점기 치욕의 시대와 싸운 대표적 황족이다. 그렇기에 워낙 일제 강점기에 악의적인 피해를 입어서, 그 참된 모습을 구체화하기도 쉽지 않은 인물이다. 일제침략 당국은 의왕을 천하에 짝을 찾기 어려운 타락한 사람으로 악선전하여, 바람둥이에다 술주정꾼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끝내 금치산 선고를 내렸으니 폐인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의왕께서 작고하신 날은 1955년 8월15일이다. 고종 14년인 1877년에 태어났으니까 78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그러니 생애 전체에 걸쳐 근현대사의 온갖 격동을 완전하게 체험하고 체득한 생애였고, 기구하기 짝을 찾기 어려운 일평생이었다.
의왕이 돌아가실 당시에 눈을 감은 장소는 안동별궁의 맨 뒤쪽 구석방이었다. 대한황실 최후의 최고 어른이었던 의왕은 엄밀히 말해 길거리에서 객사를 한 참담한 신세였다. 솔직히 말하면 모든 궁궐을 일제에 의해 빼앗기고 마지막에는 본인 소유였던 사동궁도 사라진 상태에서, 끝내 사실상의 노숙자로 노후를 보내다 그런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항일전쟁의 선두에 섰었던 의왕은 이토록 참담하게 최후를 맞았다.
안동 별궁은 안국동 네거리에 위치하여, 매우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중간 자리에 있고, 운현궁이나 사동궁 등 당시의 주요 궁궐로 가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날 인사동이 왜 관광 중심지가 되었는가는 설명이 필요 없다.
안동별궁은 그 가운데에서도 핵심지이다. 당시에는 우뚝 솟은 큰 대문과 긴 줄로 이어진 행랑채가 있는, 장려한 위풍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별궁의 용도는 황실의 혼례를 거행하는 가례 장소로 쓰는 등 주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폐궁으로 전락하여 궁중 나인들이 주로 거처하던 초라한 곳이 되었다. 빨래나 하고 허드렛일을 하던 곳으로서, 문자 그대로의 부속 별궁에 불과하게 존재했었다.
원래 이곳은 세종대왕의 8째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집과 함께 동별궁이 있던 곳이다. 세종대왕은 이곳 동별궁에서 임종하고 빈전도 거기에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문종이 여기서 임금님으로 즉위한 역사성이 큰 궁궐이다. 그 후 공주나 왕자의 저택으로 이어지다, 마지막에는 정조의 동생 은신군의 집이었다.
여기에 고종 17년에 새로 안동별궁을 지은 것이다.
그리하여 고종 19년에는 왕세자였던 순종의 가례를 올렸고, 왕세자빈이 그 후 궁정교육을 받은 곳이다. 대한황실의 가장 중요한 핵심 기능을 하던 곳이 분명했다.
이토록 중요한 안동별궁을 일제침략 당국이 그대로 둔다면 이상한 일이다. 그들에 의해 강제로 팔려 나간 때는 1937년이다. 이때는 일제의 대한황실 침탈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며 마지막 발악을 하던 시기였다. 노구교사건과 제2차 상해사변을 일으키며 중일전쟁을 시작하던 때였고, 곧이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다.
안동별궁은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에 의해 강제 불하되며 휘문소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에 풍문 여학교가 된다. 휘문학원은 민영휘의 이름 끝자에다 글월 문을 합해 휘문이 되었는데, 풍문은 민영휘의 부인 안유풍의 이름 끝자에다 글월 문을 합한 것이다.
일제강점 당국은 경희궁을 그들 자녀들의 경성중학교로 만들었듯이, 안동별궁을 학교로 불하하여 저절로 소멸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리해 안동별궁은 일제가 바라던 대로 점차 사라져 갔다.
안동별궁은 현대시대까지도 풍문여고 교정에 있었다.
총 건평 222평에 달했으나 1966년에 현광루, 경연당 건물은 경기도 일산의 서울 컨트리클럽에 옮겨졌고, 정화당 건물은 도봉구 우이동에 있는 개인 별장에 옮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교정에는 하마비를 비롯한 약간의 건물 및 흔적만 남은 참담한 상태이다. 황성옛터의 비극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현재의 풍문여고 뒷담 너머에는 아주 특이한 미로가 있다. 북촌 입구로 들어서며 풍문여고 뒷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풍문여고 바로 뒤에 흡사 벌집 형태의 작은 방이 연이어 있는 기묘한 곳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별궁 내부였던 곳이다. 오로지 이곳에만은 상궁 나인들이 거처해 불하를 못하고 마지못해 남겨진 것이다. 그러니 안동별궁의 맨 뒤 구석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작은 하나하나의 쪽방은 놀랍게도 각각 주인이 다르다고 한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옛 상궁 나인들에게 작은 방 하나씩을 나눠주어 살게 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현재는 너무나 퇴락해 어찌 서울 북촌에 이런 곳이 있을까 하고 놀라면서 어이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각각의 작은 쪽방은 겨우 한 사람이나 눕고 살 정도로, 요즘의 고시원을 보는 듯하다. 이 작은 쪽방에 있어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아주 후미진 곳이 대한황실 최후의 최고 어른이었던 의왕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다. 그 역사의 현장을 보고 역사의 내막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숨이 멎고 깜짝 놀란다.
첫째로 일제침략의 처참한 황궁 파괴에 놀라고, 둘째로 그 엄청난 어른인 의왕의 최후에 경악하는 것이다.
일제의 대한황실 침략 현장이 가장 원색적으로 참담하게 남은 곳이라 그렇다. 아니 대한황실의 최후를 너무나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곳이기에 그렇다.
의왕이 눈을 감은 때는 6.25전쟁이 막 끝난 뒤이다. 서울거리에는 전흔이 뚜렷하며, 온 나라에는 ‘굳세어라 금순아’가 울려 퍼지는 참혹한 시기였다. 이 참혹한 때에 가장 참담한 장소에서, 대한황실 최고의 어른이신 의왕은 눈을 감았다.
그간 일제침략의 가장 가혹한 피해를 입은, 황실 최고 어른이신 의왕이 작고한 장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혹간 아는 극소수 사람은 안동별궁이라고 말해 궁궐로 생각하지만, 이토록 참혹한 곳인 줄은 차마 모르고 있다.
생각하면 북촌 입구의 뒷골목 쪽방촌은 주요 문화 사적지이다. 서울시에서는 이곳의 원형을 있는 그대로 확실히 보존하며, 중요 항일 유적지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의왕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은 이런 참담한 곳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사라지는 황실의 끝자락을 지키려 발버둥 쳤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항일 역사 유적지는 이런 참담한 모습 그대로가 원형대로 생생하게 남아야 한다. 서대문형무소를 헐어버리고 독립공원을 만든 것과 같이 우매한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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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 관광객들도 아베가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이런 곳을 필수적으로 답사하게 해야 한다. 그들이 꼭 들러서 눈물로 반성하는 곳이 되어야만 되겠다. 일본의 대한황실 탄압이, 이렇게 악독했음을 꼭 알아야 한다.
안천(서울교육대학교 한국학교육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