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배 기자 기자 2014.08.08 09:00:59
[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파악해보는 특별기획 [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현대중공업그룹 1탄 태동과 성장에 대해 살펴본다.
지난달 말 공개된 현대중공업의 2분기 영업 손실액은 1조1000억원을 웃돌았다. 전년 동기 대비 적자 전환했음은 물론, 창사 이래 첫 1조원대 '어닝 쇼크'다.
이와 관련 현대중공업 측은 조선·해양·플랜트 부문에서 대형공사 공정지연 및 비용증가로 영업 손실이 확대 됐으며 대형해양설비 공정지연 및 정유부문의 설비정기보수가 매출감소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환율이 하락하며 영업적자와 매출감소 폭이 더욱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어닝 쇼크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현대중공업의 실적 발표 이후 3대 신용평가사들은 일제히 회사채 등급을 워치리스트에 올리거나 아웃룩을 변경했다. 한국기업평가는 현대중공업의 회사채 등급을 '부정적 검토' 대상에 등록했고, 한국신용평가는 아웃룩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바꾸는 등 보수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NICE신용평가도 현대중공업 등급을 '하향검토 등급감시' 대상에 등재했다.
현대중공업 측은 하반기 내 체인지 오더 발행분에 대한 비용 청구 등을 통해 손실 축소가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좀 더 지켜봐 달라"는 입장이다.
사상 최대 적자 실적에 신용등급 강등 위기, 나아가 '19년 연속 무파업'의 대기록이 깨질 가능성까지 높은 것으로 전망되는 등 노사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과거 잘나가던 현대중공업의 갑작스러운 '삼중고'가 염려되지만 과거의 영광이 여기서 끝나리란 법은 없다.
◆한편의 소설 같은 현대重 창립 실화
1972년 현대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울산의 백사장에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건설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조선공업은 당시 대한조선공사가 건조한 1만7000톤급 선박이 최대였으며, 연간 건조량은 50만G/T로 세계 시장점유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영세한 수준이었다.
특히 선박건조에 대한 경험과 숙련된 기술자가 전무하고, 조선소 건설을 위해 엄청나게 소요되는 자금도 없는 상태에서 현대가 초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겠다는 발상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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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이 창사 이래 최악의 실적을 내면서 삼중고를 겪고 있다. ⓒ 현대중공업 |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조선소 부지로 점찍어둔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 사진 한 장과 5만분의 1지도 한 장, 그리고 영국 조선소에서 빌린 26만톤급 초대형유조선 도면 한 장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우여곡절 끝에 26만톤급 초대형유조선 2척의 수주에 성공함으로써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도입 문제를 해결했다.
조선소 건설을 착수할 대만 해도 세계 조선경기는 호황국면을 이뤘다. 하지만 1973년 말 제1차 오일쇼크로 세계 해운, 조선경기는 냉각됐고, 뒤늦게 조선업에 뛰어든 신흥 현대는 초대형유조선 건조 경험 외에는 별다른 기술축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오일쇼크의 여파로 초대형유조선의 수주가 끊긴 1974년 중반부터 현대중공업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우선 대형선 위주에서 다목적 화물선, 벌크선, 목재운반선 등의 중·소형선 건조를 병행하는 등 수주선종을 다변화시켜 상황에 대처해 나갔다.
또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작업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조선 관련 사업 확장에 들어갔다.
1974년 7월 울산철공주식회사(현 한국프랜지) 설립을 시작으로, 1975년 1월 조선소 내 철구사업부(현 플랜트사업본부)와 4월 수리조선소(현 현대미포조선)를 설립하는 등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품질관리, 생산성 향상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10년 만에 일본 제치고 업계 '1위' 차지
이런 일련의 노력은 1978년도 제2차 오일쇼크 때에도 계속 강화됐다. 1978년 2월 설립 4년 3개월 만에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에서 '현대중공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한 현대중공업은 해양개발사업부 등을 신설, 사업다각화를 통한 대형공사 수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83년은 현대중공업에 있어 뜻 깊은 한 해로 기억된다. 이 해애 현대중공업은 총 210만톤 상당의 선박을 신규 수주했는데 이는 전 세계 발주량의 10.7%를 차지하는 물량으로 조선소 설립 이후 최대의 수주실적을 올린 것이다.
결국 현대중공업은 1983년 전년도 1위였던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세계 1위 조선업체로 부상했다. 설립 10년 만에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서게 된 것.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라는 타이틀에 만족하지 않고 1980년대 들어 기술집약형 체제로 방향 전환을 시작함으로써 기술 기반을 굳혀 나갔다. 1983년과 1984년 국내 최초의 민간연구소인 '용접기술연구소'와 '선박해양연구소'를 각각 준공했고, 2011년 4월 미래 신기술 개발과 글로벌 기술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중국에 '글로벌 기술연구 센터'를 설립, 세계 중공업계의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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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고비를 견뎌내고 있는 현대중공업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심기일전을 다짐하고 있다. 사진은 현대중공업 울산 조선소 전경. ⓒ 현대중공업 |
또 2011년 9월에는 울산 본사에 연면적 1만4700㎡,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의 최첨단 종합연구동을 완공하고, 선박해양연구소와 산업기술연구소, 제품개발연구소를 한 데 모아 연구개발 역량을 집중 육성하고 연구소 간 기술공조로 시너지 효과를 높이고 있다.
나아가 현대중공업은 2012년 4월 사내 연구개발 조직을 각 사업본부 소속으로 전진배치하고, 기존 기술개발본부를 기술경영실과 중앙기술원, 5개 사업본부 연구소로 대폭 개편했다.
◆멈출 줄 모르는 도전 정신
이후에도 현대중공업의 도전은 계속됐다. △고부가가치선 개발 △한국 최초의 LNG선 건조 △세계 최초 1만TEU급 컨테이너선 수주 △최첨단 드릴십 건조 본격화 △조선 제 2야드 가동 △선박 건조 1000만톤 달성 등이 현대중공업이 지금까지 이룬 쾌거다.
현대는 1993년 현대중전기, 현대중장비, 현대로봇, 현대철탑 등 4개 계열사를 합병해 국제 경쟁력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조선분야의 비중을 점진적으로 낮춰 경기 대응력을 갖춘 명실상부한 종합 중공업 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종합중공업그룹의 위상을 갖추고, 2002년 2월28일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계열분리 승인을 받아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주력분야의 기술개발, 사업 고도화 등 핵심역량을 강화해 대외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같은 해 5월에는 위탁경영 중이던 삼호중공업을 인수해 세계 최대 조선·중공업그룹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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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최대주주 정몽준 전 의원. ⓒ 프라임경제 |
현대중공업의 발자취는 바로 우리나라 중공업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수 있으며, △창조적 예지 △적극의지 △강인한 추진력으로 요약되는 정주영 창업자의 경영철학은 현대중공업 발전 신화 속에도 면면히 나타난다.
창조적 개척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세계적인 종합중공업 회사로 성장해온 현대중공업. 비록 지금은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았지만 미래 지향적 의식 개혁과 첨단기술력 향상을 통해 세계를 주도하는 세계 초일류 종합 중공업회사로 성장해 나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