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엽 기자 기자 2014.06.23 15: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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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산의 사명인 '풍산'은 창업주 류찬우 회장이 자랑스러운 가문의 이름을 남기고자 본관에서 따 왔다. © 풍산홀딩스 | ||
그래서일까. 만약 외세강점이라는 국난의 상황이 왔을 때 '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분연히 저항하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이가 적지 않은 불행한 현실에 살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변하지 않는 진실은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수 많은 이들의 피와 땀을 흘렸고 이들 후손 역시 조상들의 항쟁이 가문의 영광이자 애국의 상징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34년 11개월 일제식민 치하에서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명예로운 세 가문이 있다. 첫째는 경술국치의 원흉 이등박문을 척살한 안중근 의사 집안인 순흥 안씨와 둘째 신흥무관학교 건립을 통해 만주 일대 수많은 독립군 양성의 토대를 마련한 이회영 선생의 경주 이씨, 마지막으로 가문 전체가 600년에 걸쳐 구국 명문의 맥을 이어온 풍산 류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런 의미에서 풍산그룹은 본관의 이름을 사명으로 할 정도로 강한 자부심과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창업 이후 방위산업과 비철산업 중심으로 성장한 풍산그룹은 현재 류진 회장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했으며, 전기차와 신소재 산업 분야 등으로 사업 보폭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유학을 한 류진 회장의 아들이 최근 미국으로 국적을 변경하면서 '병역 면제'를 위한 편법 논란에 휩싸이면서 오랜 집안의 역사와 상반된 길을 걷게 됐다.
◆"류성룡이 있었기에 이순신이 있었다"
풍산 류씨를 얘기할 때 핵심에 있는 인물은 바로 서애 류성룡 선생(1542~1607) 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 퇴계 이황 선생마저도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예언을 받을 만큼 총명하고 명민했다.
이후 조선 500년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명재상이 됐고 특히 이순신 장군의 발탁과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를 손수 지어주고 실전에 활용케 하는 등 임진왜란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등 문무를 두루 겸비한 선비의 표상으로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 선생이 저술한 기록물인 징비록(懲毖錄)은 국보 132호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 국보 76호)와 함께 전체 대한민국 국보 317점 중 국가와 기관에서 작성한 기록물이 아닌 개인 기록물 중 이들 두 점만 국보에 지정될 만큼 그 역사적 가치가 높은 국보 중 국보로 평가받고 있다.
서애 선생과 충무공의 수 많은 일화는 구국을 위해 개인의 영달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를 일깨우며 백성을 위한 애민의 마음은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지금까지도 후세에 모범이 되고 있다.
◆피와 눈물 그리고 '구국의 600년'
풍산 류씨 집안에는 여섯 분의 불천위(不遷位)가 모셔져 있다. 본래 제사는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돼 있지만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로 가문의 가장 큰 영광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현재 국내에 불천위를 지내고 있는 가문은 풍산 류씨 가문을 비롯해 손에 꼽을 정도다.
서애 류성룡 선생을 중심으로 지난 600년의 역사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구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한 치의 주저함이 없이 몸소 실천을 한 선비의 집안이 바로 풍산 류씨다.
퇴계 학통을 이어 받어 서애 학맥을 계승 발전한 류씨 가문은 외세의 침입에 가장 먼저 항쟁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류종개 선생(1558~1592)은 왜적의 침략이 본격화하자 의병을 조직해 왜적과 전투를 벌이던 중 왜장 모리요시나리와의 전투 중 전사하게 되고 불천위로 모셔진 류진 선생(1582~1635)은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맹활약을 했다.
우리는 이들의 숭고한 항쟁을 통해 지금의 풍요로운 삶이 있으며, 이들 가문의 희생을 통해 누리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 풍산 류씨 가문은 항일독립전쟁의 최선봉에 서면서 구국을 위해 사실상 가문 전체가 목숨을 건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풍산 류씨 가문의 항일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유교적 선비 정신을 극대화한 자정순국(自靖殉國,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에 저항)과 무장 투쟁이다.
특히 항일자정순국은 유교의 본향인 안동 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일제의 식민 통치에 경종을 울리고, 국민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해 항일 투쟁을 계속해 나가게 만들었다.
류도발 선생(1832~1910, 건국훈장 국민장)은 경술국치의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당과 자손에게 영결을 고한 후 절명시 한 수 남기고 17일간 단식 후 순절했다.
류도발 선생의 아들 류신영(1853~1919)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암살에 격노해 항일 의병활동을 하던 중 부친의 순절 소식을 듣고 3년 상을 치르고 이후 1919년 또다시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의 독살 소식에 격분해 아버지 류도발의 뒤를 따라 자결했다.
항일독립투쟁 전 시기를 통틀어 '부자 자정순국'은 풍산 류씨가 유일하며, 선비의 지조있는 삶을 그대로 실천했다.
류응목 선생(1841~1921)은 경술국치 이후 비분강개의 삶을 살면서 국권회복의 의지를 다지면서 항일전쟁의 당위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으며, 류연박 선생(1844~1924, 건국포장)은 유림단 대표로 만국평화회의 파리장서에 참석해 일제의 부당함을 알렸다.
경술국치 전후한 시기 풍산 류씨 가문은 본격적인 무장 항일독립전쟁 체제로 전환했다. 왜적의 하늘아래에서 비굴하게 사느니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격렬히 투쟁하는 무장의 삶을 택하게 된다.
류승영 선생(1856~1881)은 일제의 침탈 야욕이 본격화 되던 시기 안동 일대 의병을 조직해 대항했지만 전투 중 사경에 이르게 되자 그의 동생 류봉영(1858~1906)은 '첫째는 국가를, 둘째는 부친을, 셋째는 형을 위하여'라는 글을 남기고 의병을 이끌고 대대적인 무력항일운동을 펼쳤으나 일제에 의해 사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류시만 선생(1863~1933)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군들의 군자금과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지원하다가 1918년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으며, 류창우 선생(1884~1921) 은 1920년 임시정부 발행 독립공채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던 중 옥사 순국하게 된다. 류벽우 선생(?~1920) 역시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하던 중 일제에 체포돼 고문으로 옥사 순국의 길을 걸었다.
류시태 선생(1890~1965)은 3.1만세운동 당시 선전부원 활동을 시작으로 의열단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았고 이후 1923년 중국에서 무기를 가져와 총독부와 일제 기관을 폭파하려다 체포돼 7년간 복역했지만 이후 또 다시 일제 비방죄로 투옥되는 등 항일의 삶을 살았다.
류시언 선생(1895~1945)은 안동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비밀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군자금 모집 혐의에 따라 체포, 징역 10년을 받았지만 탈출해 북경으로 가서 '집의학교'를 건립해 독립운동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후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 회의 참석 후 만주에서 독자적 무력항일 운동 중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류점등 선생(1897~1954, 건국훈장 애족장)은 독립만세 운동 중 체포돼 옥고를 치렀으며, 류병하 선생(1898~1987, 건국포장)은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해 이듬해 상해에서 폭탄 30개를 제조해 국내 반입 후 총독부를 비롯한 일제 기관 폭파 시도 중 체포됐다.
류시훈 선생(1917~1975, 건국포장) 역시 중국 하남성 개봉에서 숙부 류원해의 인솔로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해 무장항일전쟁을 시작하고 1940년 임시정부 소속으로 정보수집 및 전달, 군자금 모집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류소우 선생(1907~1945, 건국포장)은 1938년부터 임시정부 소속으로 중국 개봉과 북경을 거점으로 요인암살, 정보수집, 공작, 군자금 모집 등 핵심요원으로 활동해 독립전쟁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이외에도 수 많은 풍산 류씨 가문은 안동이라는 지역을 넘어 중국과 만주 일대까지 철저한 항일투쟁을 펼치면서 광복에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존재하기 힘들 것이며, 최근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유교정신은 국민보편적 가치이자 세계적 가치가 되기에 충분함을 이들 풍산 류씨 가문의 600년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병역 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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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산 류진 회장의 아들 류성곤씨가 미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방위산업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에서 병역 회피 논란이 일고 있다. ©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 ||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풍산 류씨 가문 600년 역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풍산그룹의 창업주 류찬우 회장(1923~1999)은 이러한 풍산 류씨 가문의 가풍과 명재상 서애 류성룡 선생의 국난 대비의 과업을 이어받아 사명을 본관인 풍산에서 차용해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키는 국방기업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금융감독원 전자 공시를 통해 알려진 류진 회장의 아들 류성곤씨(1993년생)의 미국 국적 취득은 창업주 류찬우 회장과 선대 조상들이 보여준 행보와 어긋나는 상황이다.
현행 법령상 22세 이전에 하나의 국적을 취득해야 하는 상황에서 조상들의 땅과 얼이 어려있는 고국을 버리고 로이스 류(Royce Ryu)로 소위 '병역 면제'용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감수하고 미국시민이 된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류 회장의 부인이자 류성곤씨의 모친인 노혜경씨는 전 국무총리를 지낸 노신영씨의 딸이며 헬렌 노(Helen Lho)로 미국시민으로 변경 공시해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이번 류성곤씨의 '병역 면제' 의혹에 대해 풍산홀딩스 홍보팀 오문길 부장은 "지극히 류성곤씨 개인적인 사안이며 현재 미국 어느 지역 어떤 대학에서 공부하는 지 등 아는 바가 없다"며 "회사와 가문의 역학관계나 기타 궁금증에 대해서도 답변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즉, 풍산 류씨의 일원인 자연인 류성곤씨가 선택한 개인적인 일로 이를 통한 도덕적, 사회적 비난과 풍산그룹과는 별개라는 것이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인 셈이다. 20세기와 21세기 가치관 충돌 내지 가문과 기업의 이분법적 잣대는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600년간 이어온 구국의 기치를 위해 피 흘린 수 많은 이들과 대한민국에도 존경받아야 할 가문이 있음을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는 국민들이 느낄 아쉬움은 분명히 남아있을 것이다.
※ [재계 히스토리] 방위산업으로 일군 풍산의 어제와 오늘 - 中 편에서는 '풍산그룹의 창립과 성장의 배경'에 대해 다룰 예정이며, 독자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