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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광장] 정치의 계절, 미완의 세월호를 넘어서

소정선 논설위원 기자  2014.05.21 11: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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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그동안 나름 사회의식을 갖고 비판하며 참여도 했지만 그런다고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내 가족, 내 이익만 찾는 것이 해답이라고 생각해요." 사건 이후 한 시민이 던진 말이다.

"떠날꺼예요. 전 이제 대한민국 국민 아닙니다." 꽃다운 소녀를 떠나보낸 단원고 학부모의 절규와 대비된다.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기본 이념과 공동체에 대한 본질적 의문을 던졌다.

한 시민의 말이 "그동안 나름 열심히 참여해 모순을 고치려 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패배의식이라면 단원고 학부모의 독백은 사회체제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해경 해체와 국가안전처 신설, 세월호 사건 특검 수용 등 중앙부처차원의 후속대책으로 문제 해결의 가닥이 잡히는 듯하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으로 과연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6월, 정치의 계절을 맞아 세월호는 공동체의식, 리더십, 규제문제, 위험사회에 대한 이해 등 해결과제를 우리 국민과 정치지도자들에게 던진다.
 
우선 공동체 의식의 실종이다. 내가 기여한 만큼 받을 수 있고, 남을 도우면 나도 도움 받을 수 있다는, 함께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뢰의 상실이다.

경쟁만이 최고선으로 떠받들리면서 이미 서구 민주사회에서도 사회존립의 암적 존재로 사형선고를 받은 정체불명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민주사회를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이, 일정한 공동체적 규칙을 가지면서 굳건하게 결합한 사회라고 규정할 때 과연 우리사회는 공동체적 의식과 규칙이 모두의 의식에 자리 잡았는지 의문이다.

아니 그런 의식과 규칙이 애초부터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세월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아직 멀었다고. 그래서 이제는 내 가족, 내 앞만 챙기는 것이 정답이라고 국민들은 외친다.

그동안 어떤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거론된 리더십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냈다. 이제 국민들은 우리사회의 지도층에게 솔선수범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까지 바라지 않는다. 다만 국민과 함께 고통하고 곁에 있어줄 지도자라면 만족한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 고위 지휘관들이 보여준 행동은 오늘날까지 리더십의 모범으로 회자된다. 전쟁의 운명을 가름한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군 군단장 핸코크는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에서 말을 몰아 진두지휘한다. 이를 본 한 병사가 제발 엎드려 포탄을 피하라고 요청하자 핸코크는 이렇게 답한다.

"지금은 사령관의 목숨을 돌 볼 때가 아니다." 핸코크의 절친이었지만 남군에 가담해 북군 공격에 나선 아미스테트 남군 사단장 역시 대열의 선두에서 돌진하면서 한 소년 병사가 전진을 멈추고 엎드려 있자 이렇게 말한다.

"소년이여, 내일의 자신을 생각해 보라. 자 같이 나아가자." 이 전투에서 두 지휘관 모두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부정부패와 무능한 관료기구가 총체적으로 합작해 만든 세월호 사건에서 자기 목숨 보전에 급급했던 선장만을 탓할 일인가.

오는 6월 선거에서 각 지역의 풀뿌리 대표자로 나설 후보들이 '국민과 함께' 라는 최소한의 리더십 조건을 과연 의식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규제완화의 기조와 방향에도 일정한 변화가 요구된다. 사회진화와 발전측면에서 불필요한 규제의 검토와 폐지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 기준과 방향이 일부 계층과 기업의 이해만을 대변할 때 규제완화는,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밝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로 바뀐다. 그리고 그 피해는 국민 모두에게 돌아간다.

규제완화라는 명분하에 과적을 눈감고 노후 선박의 취항을 연장한 결과 수백 명의 목숨이 이승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관-민, 민-민, 두 개의 영역이 규제완화 대상이다. 관-민의 영역은 역사 이래 원성의 대상이었던 만큼 관료의 횡포를 막는 규제완화는 절실한 과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민-민의 영역은 한쪽이 이익을 보면 상대는 손실을 입는다는 냉정한 분석으로, 규제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또한 근대화는 위험사회의 도래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 정치권은 이제 알아야 한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은 그의 명저 '위험사회'에서 "현대사회의 '위험'이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성' 안에 내재된 모순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과 산업 문명의 결과물인 항공기와 선박, 기차 등 첨단기기들이 자연과 인간의 생명에 대해 '제조된 불확실성과 위협'을 점점 증가시켜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해 우리의 지식이 지극히 불완전하고, 위험을 정확히 계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선진각국은 위험을 전면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비록 불완전하고 다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치적·사회적 결정들을 통해 만들어 간다.

그는 이 과정을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로 명명한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돌아보면 결국 우리의 정치 사회적 현실은 아직 성찰적 근대화에 이르지 못했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는 사회체제적인 측면에서 선진국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화성 씨랜드 화재사건,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과거 수 차례의 사건에서 경고등이 켜졌건만 우리는 문제를 '성찰'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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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권은 선거를 앞두고 세월호를 정치적 이슈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수 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인 만큼 정치적 이슈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숱한 설전과 대책이 난무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은 빠진듯 해 아쉬움이 남는다.

'물질과 제도'보다는 '인간'이 우선돼야 한다는 인간 중심적 가치관이다.

공동체의식, 리더십, 규제문제, 위험사회에 대한 이해 등 드러난 해결과제 이면에는 반드시 기본조건으로 잡아야할 것이 생명과 인간을 존중하는 가치관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 체제에 대한 강한 불신과 위기의식은 가치관의 실종을 웅변해 주고 있다.

소정선 논설위원(前 코리아헤럴드·헤럴드경제 기자, 디지털 '말' 편집국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