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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의 역사 돋보기] 명성황후 암살 전모 '최초 공개'

안천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기자  2014.05.19 14: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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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명성황후가 왜적들에게 비참하게 암살을 당한 전대미문의 야만적 사건은, 일본 같은 저질 국가에서나 저지를 인류사에 유례가 없을 참사다. 그것은 일제의 대한황실 침략사에 있어서도 최초 최대의 비극이다. 따라서 그 참혹한 참사의 현장은 많은 사람들의 큰 관심사였다.
 
명성황후 암살사건 발생일은 1895년 음력 8월20일(양력 10월8일)의 일이다. 하지만 일제의 정보통제와 증거인멸로 그 범죄 전모를 밝히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로서 그 만행을 저지른 장소는 경복궁의 맨 뒤편에 위치한 건청궁, 장안당, 옥호루 언저리라고 막연하게 알려져 있다.

당시 대한 황실은 일제의 침탈이 워낙 극심해 경복궁 맨 뒤 건물에 숨어 있듯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 외진 곳이 바로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 되고 만 것이다.
 
일본에서는 사전에 대한황실에 관한 정보를 소상하게 알고서, 황후 암살 참극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기획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항상 다양한 형태의 다양한 첩보 활동을 하면서 언제라도 침략 범죄를 저지를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간 1000년의 역사 시대에 걸쳐 일본은 항상 침략, 약탈, 강간, 방화, 살상이 완벽히 준비된 나라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건청궁 만행의 정보는 최초의 보고자인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e, 1860~1921년)이 눈으로 목격한 바가 바탕이 된 것이다. 사바틴은 멀리서 자기가 본 것을 개인적 시각으로 말한 것이다. 그는 만행의 속사정을 상세하게 아는 바도 없었다. 그래서 사바틴은 최초의 중요 정보 제공의 큰 공로를 남겼으나, 어쩔 수 없이 부정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침략 범죄 활동을 일본정부 당국에 보고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작성한 문서나 회고록 등이 발견됐다. 그리해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암살된 데에 덧붙여서 놀랍게도 그 와중에 참담한 강간, 윤간 피해까지 입었으며, 시신은 현장에서 즉시 불태워져 옥호루 앞 연못에 던져졌다는 것이 그간의 정설이 됐다.
 
그러니까 시신을 불태워 연못에 던져 증거인멸을 시도한 것 등은 그간 알려진 바였으나, 강간 암살은 금시초문의 경악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의 회고록 및 보고서에 자랑이라도 하듯 씌어져 있는 것이 훗날 한국 학자들에게 발견되며 충격을 주게 됐다.
 
그런데 최근에 대한황실의 광평대군 직계손이 귀국하며 증언한 바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그 장소에서 암살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① 사바틴설 ② 강간암살설에 이은 ③ 대한황실설이 이제야 늦게 등장한 것이다. 학문은 이렇게 더디게 진실이 규명되는 것이다.

특히 일제의 역사왜곡 인멸 피해가 극심한 항일전쟁기 연구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그간 명성황후는 경복궁 만행 현장에서 암살되지 않았다는 일부 견해도 있었는데, 그것이 맞는다는 것이다. 광평대군 직계손의 증언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당시 깊은 밤에 졸지에 기습공격을 당했으나, 충성스런 대한제국 호위무사들이 그렇게 허약하고 만만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호위무사들의 필사적인 경호에 의해서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했고, 광평대군 종가댁에 극비리에 숨어 계시다가 약 9개월 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무뢰배들은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으나, 명성황후를 목표로 했던 그 범죄행각은 실패하고 만 것이다. 왜적들은 흉악한 만행만 저질렀지 궁극적 실패를 했던 것이다. 일본의 저질 악랄함만 증명하며, 성과도 없는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들의 여말 왜구침탈은 최영과 이성계 장군에 의해서, 임진왜란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서, 그리고 경술왜란은 우리의 처절한 항일전쟁과 국제공조에 의해 패퇴했다. 왜적들은 항상 몹쓸 만행을 저지르고는 끝내 섬나라로 내쫓겼다. 그들은 항상 헛수고 패착만 둔 만행을 그 밤에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 당국에는 성공했다며 거짓말 보고서로 허위보고를 했고, 그 허위보고를 감추려고 만행 피해 궁녀들의 시신을 불태웠다고도 해석된다. 광평대군 직계손은 명성황후가 본인 집에서 돌아가셨지만, 이것은 광무황제를 포함한 극소수 황실 핵심인사들만이 아는 극비사안이라 오늘날까지 비밀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사인이 너무나 경악할 일이다. 명성황후는 불행하게도 탈출할 때에 귀가 잘린 채 탈출을 해, 과다출혈로 9개월 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 증언은 매우 충격적이고, 학술적인 의미도 크다. 왜냐하면 당시에 명성황후는 건청궁 난입사건 이후에 무려 약 2년이나 지난 1897년 11월22일에 장례를 모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일피일 길게 시간을 끌다가 장례를 모신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 분명하다. 그리해 한성부 동쪽 인창방(仁昌坊) 청량리(현 숭인원 자리)에 처음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훗날 광무황제가 독살을 당한 뒤인 1919년에 이장해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에 광무황제와 합장을 해서 모시게 된 것이다.
 
명성황후는 당시 건청궁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는데, 일본 무뢰배 낭인들에 의해서 귀가 잘리는 바람에 심각한 출혈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인 범죄자들은 내막적으로 명성황후 암살이 실패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데에 극도로 당혹해 했다고 사료된다. 그래서 한양 거리 전체에 사실상 계엄령 상황을 만들고 명성황후를 찾으려 혈안이 돼 있었다고 보인다.

그 살벌한 공포 분위기에서 일본인들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몰래 숨어 있었기에 치료를 못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례가 비정상적으로 늦춰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평대군 종가집 위치는 현재의 현대그룹 본사 앞 주차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옛 경기고(정독도서관) 입구 모서리로 운현궁 바로 건너편이 되겠다. 그 곳은 광무황제의 잠저였던 운현궁과 가장 가까운 곳이고, 경복궁에서 긴급 탈출해 숨어 있을 최적의 장소라 하겠다.

오늘날에는 현대그룹 본사 터가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사실상 별궁 차원의 비밀 안가 기와집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명성황후는 그러면 왜 귀가 잘렸는가? 그것은 매우 경악할 일로서 역사에 남을 중대사안이다. 일본이란 저질 야만국의 본질을 파악하는 충격적 증거라 하겠다. 왜적들은 놀랍게 당시에도 임진왜란 때와 같이, 증거물로 명성황후의 귀를 잘라서 오라고 시켰던 것이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로 일본 땅에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존재하는 임진왜란 때의 참혹한 귀무덤 관행이 명성황후 때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왜적들은 당시 경복궁에 난입한 저질 도둑떼 그대로였으니까 방화, 약탈, 파괴는 당연한 것이었다. 더구나 살인, 강간을 곳곳에서 자행했으니 지구상의 어디에 이런 야만 미개인들이 또 있을 것인가?

그런데 거기에다 덧붙여 증거 수집으로 잔혹하게 귀를 잘라가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을 생지옥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인류사 어디에도 없을 사례로서, 일본 같은 흉악한 사회에서나 있을 일이 그 밤에도 무참히 자행됐던 것이다.
 
당시 명성황후로 오인돼 살해를 당한 여러 여인들도 모두 귀가 잘렸을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까 일본 무뢰배들은 명성황후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귀를 잘라 가는 데에 더 혈안이 돼 있었던 것이다. 왜적들은 무작정 여러 여인의 귀를 내놓고 제 공로라고 우겼을 것이다. 
 
당시 일왕은 물론이고, 이등박문 등 여러 전범들은 모두 그런 저질 잡범 수준들이었다. 요즘 아베 총리의 행태는 대를 이은 그 모습 그대로다. 박근혜 대통령이 도저히 신뢰할 수 없게, 아베는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 하고 있다. 그 조상이 다 그런 흉악범들이었으니, 아베의 얼굴에서는 흡사 명성황후 암살 때의 잔혹했던 얼굴을 연상시킨다.
 
왜적들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옛 습성 그대로이다. 지난번에 오바마 대통령의 방일 때에도, 너무나 비열한 모습을 공개적으로 연출했다. 그토록 구차하게 오바마에게 조르고 조르다가 오바마가 방일하는 것이 확정된 그 전날에, 14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대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미국을 조롱하는 모습은 매우 전율할 장면이다. 너무나 치졸하다.

미국인은 물론이고 온 세계가 그 경악할 모습을 생생히 봤다. 미국인들은 결코 그 쓰디 쓴 모욕감을 쉽게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의 진주만 급습공격을 일본에게 당했다. '먼로주의' 입장에서 관망하다가 기습을 당하며 허를 찔린 것이다. 140명이 기습적 야스쿠니 참배를 하는 모습에서 전 미국 국민이 진주만 기습을 상기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일본은 항상 그런 야비한 나라다. 그것을 잊으면 미국은 다시 또 비극을 맞을 것이다. 더구나 아베는 곧 이어 독일을 방문해 일본은 독일같이 사죄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뻔뻔하게 망언을 내뱉었다. 독일은 그렇게 사죄하는 것이 당연해도, 일본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다. 그런 말은 외국을 방문해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돌발 발언이다.

문명국이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정신병 차원의 외교 결례 망언이다. 메르켈 총리를 면전에서 모독하는 것이며, 독일인들을 찾아가서까지 조롱하는 것이다. 아베는 100년 전 조상의 철면피 얼굴 그대로에서 변한 것이 전혀 없다. 온 세계가 흉악한 전범국 일본의 무뢰함에 경악할 일이었다.
 
명성황후 암살 이후에 광무황제는 복수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광무황제는 고영근 협객을 시켜 공범 매국노 우범선을 처벌했고, 안중근 의사를 시켜 최악의 범죄자 이등박문을 응징했으며, 이석용 의병장 등을 시켜 벌떼 같이 구국항쟁을 일으키게 했는가를 백 번 수긍하게 된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누구나 복수의 마음으로 절치부심했으며, 그러다 광무황제까지 독살됨에 따라 총궐기 한 것이 3.1만세항거였던 것이다. 그리고 뜻 있는 우국지사들은 망명 항일 독립전쟁의 길로 달려갔던 것이다. 3.1 만세항쟁 이후에 곳곳에서 우후죽순 같이 생긴 임시정부나 독립군은, 그 뿌리가 명성황후 암살에서 비롯됐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100여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명성황후가 돌아가신 장소조차 제대로 모른 채 현재에 이르렀다.

지금이라도 광평대군 종가댁이었던 그곳에 항일 위령비를 세워드려야 하겠다. 일본 강점 하에 비극적 삶이 장기간 이어졌고 일본의 증거인멸에 의해 그간 역사를 잘 몰랐으나, 늦게라도 알았다면 왜적을 꾸짖는 극일 위령비를 마땅히 세워야만 하겠다.
 
현재 그 터를 자리 잡은 '현대家'에서는 명성황후의 원혼을 달래드리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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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전쟁 최초 시기의 거국적 국가과제는, 명성황후 암살의 원혼을 위무하고 복수하는 것이었다. 온 나라가 복수의 칼을 갈며 치를 떤 일이었다. 일본은 이에 대해서 아직까지 전혀 답변이 없다. 특급전범 일왕이 홍릉을 찾아 명성황후와 광무황제 혼백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피눈물로 참회하는 석고대죄는 필수적이다.

그것이 없다면 일본은 영원히 추악한 저질 야만국이며, 일왕은 흉악한 무뢰배 잡범에 불과하다.

안천(서울교육대학교 한국학교육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