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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남어 산, 악재 뒤엔 호재도…" 3세 경영 코오롱

[기업해부] 코오롱그룹 ① 태동과 성장…한국 최초의 나일론

이보배 기자 기자  2014.05.16 13: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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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파악해보는 특별기획 [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코오롱그룹 1탄 태동과 성장에 대해 살펴본다.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생산하며 국내 섬유산업을 이끌었던 코오롱그룹이 올해 환갑을 맞았다. 코오롱그룹은 1954년 창업주 故 이원만 선대회장이 세운 '개명상사'를 모태로 성장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 

◆환갑 맞은 코오롱그룹, 3대에 걸친 성장

이 창업주는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기업가의 길을 걷게 됐다. 낙선 후 1951년 일본에서 나일론 원사를 수출하는 '삼경물산'을 차려 큰돈을 번 뒤 한국에 세운 나일론 무역업체가 바로 '개명상사'다.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은 3대째 그룹을 맡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 코오롱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은 3대째 그룹을 맡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 코오롱
이후 이 창업주는 1957년 국내 첫 나일론사 제조공장이자 코오롱의 전신으로 불리는 '한국나일론'을 설립했다. 한국나일론은 나일론을 직접 생산할 목적으로 설립됐고, 당시 자본금 2000만원에 종업원수는 약 30여명에 불과했다.

1963년에는 나일론 원사 공장을 지어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생산하는 등 국내 화섬산업의 기틀을 닦았고, 이후 1969년에 한국폴리에스텔, 1976년에는 코오롱유화를 각각 설립했다. 이 창업주는 1960~70년대 정재계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한국섬유공업의 기수' '수출한국의 선구자'로 불렸다.

이 창업주가 코오롱의 기틀을 만들고 한국 섬유산업의 시작을 알렸다면 이동찬 명예회장은 오늘날의 코오롱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1960년 코오롱건설의 전신인 협화실업을 세워 사업영역을 넓혔고, 이후 이 창업주가 설립한 한국나일론은 1977년 한국폴리에스텔과 합병하며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상호를 변경, 새롭게 출발했다. 이때 이 명예회장이 경영자로 전면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2세 경영이 시작됐다.

이 명예회장의 취임과 함께 코오롱은 기술혁신에 속도를 냈다 1973년 국내 최초로 자동차소재 사업에 진출했고, 1980년대엔 필름 및 산업자재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갔다. 1990년대 들어서는 고부가가치 섬유제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1993년 초극세사를 이용한 고도의 원사기술, 초정밀 공정관리 기술이 결집된 섬유소재 '샤무드'를 세계에서 3번째로 양산하는데 성공한다.

이 같은 사업 다각화 움직임은 1996년 코오롱 회장으로 취임한 이웅렬 회장까지 이어졌다. 코오롱의 3번째 수장인 이 회장은 40세에 그룹 총수가 됐다. 이후 신세기통신 주식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에 주력했다. 과천사옥을 완공, 코오롱의 과천시대를 열었고, 전 그룹사 복장자율화를 시행, 기존 코오롱문화에 디지털 경영을 접목한 '디지털 플러스 경영'을 전개하면서 그룹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악재에 골머리 썩기도

하지만 코오롱의 고속성장은 2000년대 들어 제동이 걸렸다. 섬유경기 침체 등으로 경영난을 겪었고,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대내외적으로 많은 상처를 입었다.

   60년 역사의 코오롱그룹은 악재와 호재를 거듭하며 성장하고 있다. 사진은 코오롱타워 본관. ⓒ 코오롱  
60년 역사의 코오롱그룹은 악재와 호재를 거듭하며 성장하고 있다. 사진은 코오롱타워 본관. ⓒ 코오롱

2004년에는 최악의 암초를 만나며 죄초위기에까지 몰리기도 했다. 473억원의 코오롱캐피탈 횡령사건으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타격을 입은 것. 같은 해 말에는 구조조정을 시작하면서 구미공장의 근로자를 '희망퇴직'과 '정리해고' 형식으로 감원했다. 물론 이는 근로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일부 정리해고자들은 지금까지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2004년과 2008년에는 이 창업주의 혼외자식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4년에는 이동구씨가 미국에서 자신이 이 창업주의 9번째 자식이라며 코오롱그룹을 상대로 50억원의 소송을 벌였고, 2008년에는 스웨덴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정현씨가 이 창업주의 8번째 자식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코오롱 측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 당시 근무했던 직원이 모두 퇴사한 상태고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일축했다. 이후 시간은 흘러 지금은 재계 비사의 한 토막으로 남아있다.

악재는 올해도 이어졌다. 지난 2월 마우나리조트에서 10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204명의 사상자를 낸 체육관 붕괴 사고가 발생한 것. 눈에 띈 것은 이 회장의 사고 대처 방법이었다.

붕괴사고 발생 직후 이 회장은 다음날 코오롱 본사에 대책본부를 꾸린 다음 새벽 경주로 직접 내려갔다. 이날 오전 6시께 리조트 본관 5층에 마련된 현장 지휘소에서 직접 사죄의 뜻을 밝혔다.

이 회장의 발 빠른 위기대응은 성난 여론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과거 2004년 '낙동강 페놀 사태' 때와 달리 이번 사건은 회사 이미지를 제고하는 계기가 됐다.

◆재도약 의지에 날개 달고 화이팅

그런가 하면 지난 4월 미국 화학기업 듀폰과 아라미드섬유를 두고 벌여온 1조원대 소송의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승소한 것은 코오롱의 재도약 의지에 날개를 달아줬다.

   코오롱그룹 CI. ⓒ 코오롱  
코오롱그룹 CI. ⓒ 코오롱
미국 재판부는 지난 2009년 코오롱에 아라미드 영업비밀에 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해 9억2000만달러(약 1조원)을 배상토록 판결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원심 파기환송으로 5년간 이어져 온 소송에서 전세가 뒤집혔다.

이를 계기로 코오롱은 그룹 미래먹거리 사업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게 됐다. 이번 소송 승리로 경영 불확실성이 제거된 만큼 위축됐던 북미와 유럽 등 해외 영업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은 코오롱그룹 임직원은 '글로벌 톱 종합 화학·소재기업'으로 도약한다는 결의에 차 있다. 그동안 21세기 글로벌 화학소재기업 구현을 위한 사업구조 고도화에 힘을 쏟아온 만큼 이제 열매를 맺을 차례라는 것. 이를 위해 이 회장이 강조해 온 '혁신하는 근성'으로 무장하고 다시 한 번 도약할 각오가 돼있다.

60년 역사의 코오롱, 악재가 있었지만 호재도 있었다. 오랜 침체기와 악재를 딛고 새로운 성공시대를 열어갈 코오롱과 이 회장의 행보가 광범위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