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사는 사람은 흔할지 몰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았을 때에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일이라는 게 하다 보면 자신의 신념이나 취향과는 맞지 않더라도 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프로보노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굉장히 어렵고 부담스러운 질문일까?
필자가 한창 일에 치여 지내던 때의 얘기다.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이런 저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도저히 글을 읽어낼 여력이 없었다. 머리에 신선한 바람이라도 쏘이고 다시 일을 시작하겠다는 마음에 필자는 거리로 나와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으로 향했던 것은 잠시 쉬러 나온 와중에도 머리를 온전히 비우고 글을 내려놓기에는 불안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다른 책을 훑어보며 머릿속에 고정된 몇몇 단어를 털어내겠다는 생각으로 서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필자는 책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은 무슨 책을 읽나 주위를 둘러봤다. 때마침 엄마와 아이가 나란히 책장에 기대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책을 저리도 재미있게 읽고 있을까. 필자는 슬그머니 아이 옆에 다가가 무슨 책을 보는지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엄마가 읽어 주는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그래, 그림책이라면 글이 별로 없으니 머리 식히며 읽기 안성맞춤이겠다.'
필자는 예전에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던 친구가 추천해 주었던 그림책 한 권이 떠올랐다. 에른스트 얀들이 글을 쓰고 노르만 융에가 그림을 그린 '다음엔 너야'라는 작품이었다. 필자는 그 책을 찾아 아이들 틈바구니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어두운 실내, 어떤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벽 쪽으로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의자에는 어딘가 조금씩 부서진 인형들이 초조한 표정을 하고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가 방으로 들어가고, 다음 장에서 들어갔던 인형이 나오고, 뒤를 이어 다른 인형 하나가 들어가고 다음 장에서 밖으로 나온다.
방으로 들어갔던 인형들은 멀쩡하게 치료를 받고 편안한 표정으로 나오고, 순서를 기다리는 인형들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가장 마지막에 앉아 있는 코가 부러진 나무인형이 주인공이다. 다른 인형들보다 훨씬 더 초조해 보인다. 나무 인형이 불안해하는 사이, 나무인형 바로 앞 차례였던 개구리 인형이 방 안으로 들어간다.
방 문 앞에 홀로 남은 나무인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드디어 바로 앞 차례였던 개구리 인형이 방에서 나오자, 잔뜩 움츠린 나무인형은 조심스레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연다. 나무인형의 눈앞에 방안 풍경이 펼쳐진다. 방 안에는 어떤 의사가 나무인형을 기다리고 있을지,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아이들 틈에 껴들어가 앉아 책을 읽던 필자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남들은 별 탈 없이 잘 사는 것 같고, 문제가 생겨도 쉽게 풀어가는 것 같은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사건사고가 많은 걸까. 뭐가 이렇게 힘들까.
나도 좀 편안하게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당장 자고 일어나면 펼쳐질 내일 하루도 예측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내게도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겠지 생각하며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불안함을 극복한다면 나무인형처럼 의사를 만나게 될까. 아이들이나 보는 책이라고 생각했던 그림책 한 권을 읽으며 이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해석이지만, 그 당시 이 책을 읽으며 받은 위로와 치유의 느낌은 어린이 책, 그 중에서도 그림책에 대한 필자의 인식 자체를 뒤바꿔놓았음은 물론이고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까지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플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내 자신이 속세에 찌든 속물처럼 느껴질 때면 필자는 책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보물, 그림책을 꺼내 읽는다. 그러면 그 책들은 솔직하고 순수한 시선으로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 안에 있는 욕구와 위선을 직면하게 도와준다.
서두에 던졌던 질문,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그 일을 통해 프로보노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이를 위해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책을 읽을 모든 독자들에게 책 속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투사해 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내가 가진 능력을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면 하기 싫은 순간, 타성에 젖는 순간이 오더라도 다시금 기운을 차리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즐겁게 밥벌이를 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의미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 자아실현과 함께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보노로서의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영은 독서칼럼니스트 / 번역가 / 출판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