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지난 3일 본지 코너인 '여의도25시'를 통해 '성희롱 당한 뒤 해고까지…내막 들여다보니'라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했다. 기사가 나간 이후 세간에 알려진 것과 내용이 달라 먹먹해 하는 피해자 가족과 연락이 닿아 그들을 유·무선 밖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고 지난 8개월간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체를 채우지 못했던 취재로 부득이하게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고통을 안긴 기자의 과오를 반성하기 위해, 미완인 기사의 마감을 위해, 이 글을 읽을 독자에게 전해질 이 사건의 사실기록을 위해 남은 기사를 마저 작성하기로 마음먹었다. 글이 칼과 총보다 강한 이유는 사건이 회자되는 한 언제까지나 기록으로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만이나 있을 것을. 어차피 홈플러스라는 대기업에게 맞서지만 않았다면 일자리까지 잃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함께하자던 동료와 친언니처럼 여겼던 사람마저 등 돌리는 모습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죠. 당장 생계도 걱정이지만 사람에게 실망한 상처가 아물지 않네요."
홈플러스 대구 칠곡점 외부 전경. = 전지현 기자 |
그러던 중 이씨는 지난달 8일 해고소식을 듣게 됐고 며칠을 술로 요기했다. 평소 좋아하지도 않던 술을 마시며 우울증상도 심해졌다. 이날 취재에 함께한 경화씨의 여동생은 연신 걱정스런 눈빛을 보이다 이내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가득 담았다.
◆3년 정든 내 직장, 자괴감 들어도…
사건이 발생한 홈플러스 대구 칠곡점 매장에는 3년 전 발을 들였다. 1층 화장품 매장(입점업체)부터 3층 의류매장까지 2년 동안 일반 직원이었지만 열심히 근무했다. 덕분에 지난해 8월, 3층의 한 의류매장에서 관리직급인 매니저로 일하는 기회를 잡았다. 물론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진급이라 희망과 함께 자부심도 갖게 됐다.
홈플러스 대구 칠곡점 3층 매장 내부 전경. 1~2층과는 달리 홈플러스 이 매장 3층에는 30여개가 넘는 임접업체들이 즐비하다. = 전지현 기자 |
그러던 어느 날, 홈플러스 소속 A과장이 3층 파트장으로 부임하면서 이씨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가슴앓이를 시작하게 됐다. 족히 30~40여개 되는 임대점을 관리하는 A과장의 강압적인 말투와 행동은 '20년 동안 일을 해왔지만 이렇게 힘든 적이 있던가'라는 생각을 이씨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떠올리게 했다.
"홈플러스에는 비밀 감시제도인 '쇼퍼제도'란 것이 있어요. 고객을 가장해 매장에 들어와 근무평점을 매기는데 정직원은 인사고가에 반영하고 협력업체의 경우 매장점주에게 알리죠. A과장은 아침마다 아르바이트부터 매니저까지 모아 조회를 하는데 어느 날 '쇼퍼X들이 일을 잘 안 한다'며 욕설을 섞더군요."
물론 욕설도 그랬지만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A과장의 평상시 말투에 이씨는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였다.
"하루는 아르바이트생과 함께한 자리에서 진열된 상품 속 가격 태그를 떼어 바닥에 던지며 '매장 빼고 싶냐, 일 그만하고 싶어?'라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그 아르바이트생은 곧장 일 못하겠다며 그만두겠다고 말하더라고요. 물론 저도 불쾌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죠."
◆40대 가슴에 20대 다리, 이씨의 최선은…
홈플러스에서는 아침조회는 물론 월 1회 성희롱 교육과 분기별 친절강화교육에도 참여해야 한다. 이렇듯 자주 얼굴을 마주하는 만큼 A과장의 말투에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동생뻘인 사람에게 심한 하대를 당하다보니 '혼자사니 업신여기나'하는 비통함만 커졌다.
이렇게 하루하루 골머리를 싸매려 지내던 이씨는 어느 날 A과장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됐다. 정수기에서 물을 따르던 이씨에게 A과장은 "이경화씨는 가슴은 40대인데 다리는 20대네"라며 질 낮은 농을 던졌다.
집에 와 한참을 울었다. 평소 그랬듯 그날도 동생 내외에게 하소연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 상황에서 마침내 누구보다 이씨 편에 섰던 동생의 남편 김언형(가명)씨가 억눌렀던 분을 비로소 터뜨렸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던 김씨는 지난 1월24일 홈플러스 칠곡점을 찾아 민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김씨는 "처형이 평소에도 언어폭력과 모멸에 가까운 대우를 받는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잘못된 것은 바로 잡자는 마음에 참지 못해 홈플러스에 A과장의 행동에 대한 민원을 넣었고 재발방지를 요구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명절 후 2월2일. 직장에 복귀한 이씨는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갑작스레 A과장이 호출해 'VOC(고객불만관리시스템)에 한 고객이 이경화씨가 욕설을 퍼붰다고 민원을 제기했다'고 하더군요. '(당신도 나처럼 민원을 받아보니) 기분이 어떻냐'고 비아냥거렸어요."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고객에게 욕은커녕 그럴만한 상황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혼잣말로 욕설을 했나' 기억을 되새겼지만 매장크기와 고객이 지나가는 복도와의 거리 등 모든 정황을 고려하면 혼자 흘린 말을 밖에서 쉽게 들을 수 없던 터였다.
그리고 6일 뒤인 2월8일, 그는 해고 통지를 받았다. 욕설 시비에 더해 7일 저녁 퇴근시간인 밤 11시간보다 1시간 빨리 나섰다는 게 해고 사유였다.
◆성희롱·언어폭력 민원 후 3주 "없었다. 조사는…"
"갑을관계로 따지면 홈플러스의 경우 '매출이 안 나오면 퇴점 조치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일로 홈플러스 감사실에서 담당자가 나와 조사를 실시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당사자들이 모두 둘러앉은 자리에서 경위서를 작성하라고 하니 다들 겁먹고 뒤로 물러났어요."
이씨의 제부 김언형씨는 "무기명으로 했다면 모두들 앞을 다퉈 얘기했을 것"이라고 말을 보태며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더욱 억울한 것은 2월8일 해고 이후 사건에 대한 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민원에 대해선 단 한 차례 조사도 없었으면서 오히려 처형에게 민원이 발생했다며 매장주를 통해 해고했으니 어디에 호소해야 합니까?"
의도하지 않아도 힘줘 말할 수밖에 없는 김씨의 하소연에서 답답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김씨의 말처럼 성희롱 및 언어폭력 민원 접수 후 3주 동안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씨의 가족을 분노와 절망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불쏘시개가 돼 그들을 고문했다.
김씨의 말을 빌리면 성희롱 언어폭력 민원을 접수받고도 3주간 이씨에게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일이 복잡해지려던 때 칠곡점장과 직원들은 '어떤 일을 하고 싶냐'며 '계속 근무를 하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이와 관련 김씨는 "진실을 꼭 밝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며 "비록 거대한 기업을 상대로 혼자 외롭게 고군분투하지만 진실을 꼭 밝혀질 것"이라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현재 이씨와 그 가족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사과뿐이다.
한편 이 일이 있고 난 후 A과장은 이달 1일자로 홈플러스 구미점 발령을 받았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A씨는 일단 대기발령 상태로 이번 주나 다음 주 중 인사위원회를 통해 사후 처벌문제가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며 "정확한 것은 감사팀에서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6월 롯데마트는 협력업체 직원에 막말을 했다는 VOC 민원에 따라 해당 직원을 신고 일주일 만에 보직해임한 바 있어 주목된다.
무엇보다 이 같은 조치 이후 노병용 롯데마트 대표는 '협력업체에 막말을 하거나 상식 이하 행동을 하면 3년간 보직을 맡기지 않겠다'는 내용의 공정거래 정착 로드맵을 발표, 인성교육과 직무전문성시험을 거친 직원에게만 협력사 상대 업무를 맡기겠다고 밝힌 사례가 있어 향후 홈플러스 측이 어떻게 사건을 이어갈 지 관심이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