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며칠 앞뒀던 어느 날 마음이 무거웠다. 필자가 진행하고 있는 사건의 의뢰인, 여운택 할아버지께서 지난 연말에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선배 변호사들이 "변호사 일을 하는 중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진행 중인 사건의 의뢰인의 죽음"이라고 한 얘기가 기억이 났다.
10년의 변호사 생활 중 두 번째 맞는 일이다. 두 번째이고 그 사이 다섯 해를 더 살았는데도 내게는 이런 일을 수용하거나 소화할 수 있는 힘이 전혀 더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소식을 듣는 순간 숨이 탁 막히고 눈물이 났다. 진행 중인 사건을 온전히 마무리 못한 죄송함을 주체하기가 버거웠다.
여운택 할아버지는 1923년생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제철의 오사카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강제동원 피해자다.
할아버지는 일본의 '일본제철지용공재판을 지원하는 회', 우리나라의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 협의회(이하 보추협)' 등의 지원으로 다른 피해자 분들과 함께 1997년 일본에서 먼저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신일본제철', 2012년 8월 스미토모 금속종업주식회사를 합병한 후 2012년 10월 상호를 '신일철주금 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를 상대로 소 제기를 했고,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의 상고기각 판결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5월 당시 부산에 분사무소를 두고 있던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이하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강제동원 손해배상청구의 소가 먼저 제기됐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 한일청구권협정의 효력이 미치는지 여부가 중요 쟁점으로 떠올라 우리 정부를 상대한 한일청구권협정 문서 관련 정보공개거부처분취소소송이 진행됐다.
서울행정법원은 2004년 2월 일부 문서 공개를 인용하는 판결을 선고했는데, 필자는 그 무렵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법무법인에 입사했고, 일제피해자 구제 문제에 매진하고 있던 장완익 선배 변호사의 권유로 강제동원 사건의 공동대리인으로 합류했다.
필자는 이렇게 2004년 여운택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고, 2005년 2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일본 판결 중 최종 승소 판결은 없었지만, 태평양전쟁의 여러 나라 피해자들이 진행한 하급심 판결 중에는 청구권협정의 효력 외에 다른 쟁점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의 주장을 채택한 경우들이 있었다. 여기에 우리 정부가 2005년 8월 총 156개 문서철에 약 3만5000쪽 분량의 청구권협정에 관한 자료를 공개해 새로운 증거들이 확보됐기에, 우리 법원에서는 일본과 다른 판결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소 제기 시점으로부터 3년이 넘게 지난 2008년 4월 선고된 1심 판결은 앞서 선고됐던 미쓰비시 사건에서 일부 인정한 바 있는 법률적 주장들(확정판결의 승인효 배제, 일본 법의 효력 배제, 기업의 법적 동일성)조차 배척하며, 원고들의 청구를 전부 기각했다.
당연히 당사자인 여운택 할아버지를 비롯한 피해자분들의 우리 법원에 대한 실망과 낙담은 컸고, 실제 한 분은 항소를 포기해 네 분만 항소심을 진행했다.
2009년 7월 선고된 2심 판결은 증거 부족으로 일본의 응급조치법등이 국제법 질서 또는 우리나라 헌법에 위반해 무효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까지 추가했다.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좋지 않은 판결이 나오고 개별 쟁점들에 대해서는 일본 판결보다도 후퇴하는 판결로 이어지면서, 피해자 분들도 일본 지원 단체들도 한국 법원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분노했다.
소송대리인인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증거나 법리로 재판부를 설득하지 못해 패소 판결이 확정돼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 많이 두려웠다. 신일본제철 사건의 상고이유서를 쓰면서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런 긴 시간의 좌절과 어려움들 끝에 2012년 5월 대법원에서 최초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사건'에 대해서 승소 판결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한 일본의 확정판결을 우리나라에서 승인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우리나라의 사법주권을 회복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파기 환송심이 다시 진행됐는데, 신일본제철은 파기환송심에서 기존 대리인을 사임시켰다가 다시 선임하는 방식 등으로 소송을 지연시켰다. 대법원 판결로부터 1년이 넘게 지난 2013년 7월에서야 '피해자들에게 각 1억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승소 판결이 선고됐다.
선고 당일 법정에 같이 출석했던 여운택 할아버지는 이렇게 살아생전에 일본 전범기업들의 불법행위가 인정되고 승소 판결을 받을 수 있게 돼 너무 기쁘다고 통곡을 하시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1997년 이미 희수의 지긋한 나이에 시작했던 그 외로운 싸움이 2013년 아흔의 나이가 돼서야 식민지배 및 강제동원의 불법성, 위자료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피고 기업들의 상고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아직도 식민지배 및 강제동원 자체의 불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끝나지 않은 싸움 중이다.
피해자들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를 입은 지 이미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쓰비시 사건은 2000년 5월에, 신일철 사건은 2005년 2월에 소 제기가 됐고, 미쓰비시 사건의 원고 분들은 모두 대법원 판결 선고 이전에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리고 얼마 전 여운택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셨다.
또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인지…. 속절없이 흐르고 있는 세월 속에 유명을 달리하고 계신 일제 피해자분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죄송스럽다. 일본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가 일제피해자들 앞에 무릎 꿇고 속죄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법이나 경제 문제가 아닌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가 지금이라도 시간 연장을 하면서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비인도적 만행을 중단하길 바란다.
김미경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 한국코치협회 KAC 전문코치 /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심판담당 공익위원 / 대한변협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회 위원 / 고려대 법대 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