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영 기자 기자 2014.01.15 08:24:13
[프라임경제]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을 연주하는 유일한 오케스트라 하트체임버. 이 단체의 정식 명칭은 '하트 시각장애인 체임버 오케스트라'다. 이름에서 견줘볼 수 있듯 하트체임버 단원 대부분은 악보를 전혀 볼 수 없다. 이곳 단장이자 나사렛대학교 관현악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상재 음악감독을 만나 진솔한 얘기를 들었다.
이상재 단장과의 첫 만남은 한 마디로 '뜻밖'이었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그 역시 '장애'를 안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것도 단원들과 같은 시각장애였다.
"몇 해 전 모 방송국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분이 이런 말을 기사에 썼었어요. 하트 시각장애인 체임버 오케스트라에 지휘자는 서로의 마음속에 있고, 악보는 연주자들 머릿속에 있다고요. 이 글귀가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이처럼 하트체임버 단원들에게 지휘나 악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지휘와 악보는 연주를 하는데 필수 불가분한 존재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그 보다 더 필요한 건 용기였다.
◆부정에서 긍정이 될 때까지
이상재 단장이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창단을 결심하게 된 건 지난 2007년 3월, 피바디음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난 직후였다.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위치한 피바디음대는 존스홉킨스대학교에 속했으며 줄리아드·커티스와 함께 미국 3대 음악대학으로 꼽힌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클라리넷, 플롯 이런 악기들은 혼자 하는 것보다 오케스트라 멤버로 연주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은 음대를 졸업하고 외국유학을 다녀와도 단원이 될 수 없습니다. 지휘봉과 악보를 볼 수 없기 때문이죠."
= 이보배 기자 |
그러나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음악을 전공한 시각장애인 연주자들이 많지 않았던 데다 모두 불가능할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음대를 졸업한 (시각장애) 연주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했지만 다들 꺼려하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면 말더라도 일단 해보자고 설득했죠. 14명 단원을 모으는데 만 수개월이 걸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07년 5월12일 첫 연습을 시작했다. 앞서 이 단장은 에드워드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점자 악보로 만들어 단원들에게 외워오라고 시킨 상태였다.
"그때 일은 아직도 상세히 기억납니다. 첫 합주를 마치고 모두들 해냈다는 생각에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지르고 발을 동동 굴렀지요."
◆활 턴 값도 못 받았던 시절
같은 해 7월19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첫 연주회가 영산아트홀에서 펼쳐졌다. 각종 언론매체는 '기적의 음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음악적 재능을 가진 국내외 장애아동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자 잊히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창단 당시 이 단장을 후원했던 곳도 차츰 힘든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처음 1년8개월 정도는 후원사 지원을 받아 여러 곳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교통비, 연습비 같은 게 기본 지원이 됐죠. 하지만 예상보다 오케스트라 유지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다 보니 재단 쪽에 어려움이 있었나 봐요. 2008년 12월31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지원이 어렵다, 해체하는 게 어떻겠느냐'란 연락을 받게 됐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연습하는 데만 족히 200만원이 넘게 드니 재단 쪽 입장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그러나 단장 입장에선 '오케스트라 해체' 또한 그리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단원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꿈과 비전을 제시한 제가 1년8개월 뒤 재단지원이 끊겼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는 당시 회상에 이 단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트 시각장애인 체임버 오케스트라 공연에는 두 가지가 없다. 바로 악보와 지휘자다. ⓒ 하트체임버 |
예를 들어 국가기금 공연사업 3~4개를 해서 1억원 정부지원금을 받으면 최소 1000만~1500만원가량 자기부담금이 들어가는 식이다. 이는 국가기금사업 같은 경우 정부지원금을 오직 공연에만 써야하는 탓이 크다. 따라서 연습실 임대료나 버스대절, 단원 교통비에서 식대까지 당장 이 단장 주머니에서 나와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렇다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자신을 따라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단원들을 위해 공연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연간 억 단위 결손을 뒤로한 채 이 단장이 지금껏 하트체임버를 이끌어온 이유다.
음악에 대한 이 단장의 욕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결손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풍부한 음악적 색을 더하기 위해 단원 늘리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초창기 멤버 중에 6명이 그만뒀습니다. 처음엔 직업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부수입처럼 된 거죠. 실제 초창기에는 공연을 1년에 스무 번도 채 못했어요. '활 터는 값도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2009년도만 해도 20회를 채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색이 풍부해지면서 공연도 늘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공연을 구매하는 입장에서 제값 주고 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꿈에 그리던 뉴욕 카네기홀 공연, 현실로…
2010년 말 오케스트라를 유지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즈음 하트체임버에 기회가 찾아왔다. 한 지인이 "큰 공연을 하나 기획하는 게 어떻겠느냐. 미국 카네기홀 초청장을 가져오면 지원을 고려해 보겠다"고 제안한 것이 전환점이 된 것이다.
"2010년 말 더 이상 국가나 단체지원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국회의원과 보좌관, 보건복지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때 한 분이 하트체임버를 알릴 수 있는 국제적 무대에 도전해 보라고 조언하더라고요. 그래서 카네기홀에 우리를 초청해달라고 편지를 보내게 됐습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도 기다리던 답장은 올 생각을 안했다. 답답한 마음에 유학시절 알던 교수와 평론가들에 상황을 물어본 이 단장. 이때 뉴욕 필하모닉 부학장이 관심을 갖고 합주 동영상을 요구했다. 일단 동영상을 먼저 보고 초청받을 만하다고 생각되면 카네기홀 대관담당자를 소개시켜주겠다는 얘기였다.
'마음 속 음악으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라는 뜻을 지닌 하트체임버 공연 모습. ⓒ 하트체임버 |
그러나 '카네기홀 초청장을 가져오면 지원을 생각하겠다'던 관계자는 입을 씻고 말았다. 진짜 카네기홀 초청장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그렇다고 꿈에 그리던 카네기홀 공연을 이제와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 단장은 부족한 금액 4000만원을 개인자금으로 메운 뒤 미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카네기홀 공연 때 청중 모두가 기립박수를 쳤죠. 앵콜곡으로 3곡을 준비했는데도 모자라 마지막엔 저 혼자 올라가 인사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정도면 귀국해서 뭔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공연이 10여회 더 늘어난 것 외엔 아무것도 없더군요."
◆문광부 제1호 사회적협동조합 탄생
일반 회사에 비해 매월 가져가는 개런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단장은 단원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고 싶었다. 하트체임버가 문화체육관광부 제1호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거듭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진 않았다.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됐지만 각 부처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정의를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탓이 컸다. 여기에 필요서류도 적잖았다. 단원에 대한 정보부터 공연 횟수, 퀄리티까지 준비해야 할 서류가 수십개는 족히 넘었다. 6개월간 고생해가며 예술인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사회적협동조합 인가를 받았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협동조합과는 다르게 비영리법인 성격을 띄고 있으나 그래도 단원들 먹고 살게는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바람이다. 일례로 기부금영수증이 여기에 속한다.
이 단장은 "하트체임버 경우 지역주민 권익과 복리증진, 취약계층 사회서비스나 일자리 제공 등 어느 하나 조합설립에 해당하지 않는 게 없지만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100% 자기부담금으로 유지하라는 덴 무리가 있다"며 "적어도 기부영수증을 발급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희망했다.
이 단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풀었다.
-일반 오케스트라와 다른 점은.
▲나를 포함한 단원들 대부분이 시각장애를 안고 있다. 따라서 청중들에게 더 큰 감동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것 같다. 지난 12월23일 공연 때도 그랬다. 공연이 끝나고 며칠 동안 "감동받았다" "내년에는 자녀들과 함께 오겠다"는 전화를 받는 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우리보다 연주를 잘하는 오케스트라는 많다. 하지만 암전공연 같은 것은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가능한 무대다. 이때의 느끼는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악보를 다 외워서 하나.
▲자기파트는 무조건 다 외워야 한다. 나는 단장이니까 전 파트를 다 외운다. 한번 공연하면 기본이 13곡에서 14곡 정도고, 보통 한 곡에 점자악보가 15장에서 20장정도 된다. 12월 무대라면 늦어도 8월 중순부턴 연습에 들어가야 한다. 악보를 펴놓고 지휘자를 보면서 하는 거라면 쉬울 텐데, 이번에 브람스 교향곡을 하면서 어려운 곡은 넣지 말자는 단원들 원성이 있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료공연도 가끔 가는데 교정시설 공연 때 우리가 못 올 곳을 온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시작할 때도 맹숭맹숭 뭔가 싸늘하고 차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공연 1시간을 하면서 점점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엔 재소자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교도관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으니 재소자 3명이 나와서 "오케스트라 보기 부끄럽지 않게 착하게 살고 싶다"고 하더라. 마음이 짠했다.
또 청량리 노숙인 쉼터를 방문했을 땐 누워있는 사람도 있고 연주하는데 고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도 1시간 공연하는데 끝나고 나니 신발을 찾아주기도 하고 물을 떠서 주기도 하고, 우리가 사간 빵과 우유를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우릴 보고 느끼고 그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도 아동지원센터라든지 노숙인 쉼터라든지 교정시설에서 섭외가 오면 가능하면 참여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