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사대부 집안의 딸내미가 시집가면 어머니가 혼수품에 장도를 걸어줍니다. 우리 가문을 더럽히지 말고 그 가문을 빛내라는 의미죠. 요즘도 장도의 뜻을 아시는 분들이 장도를 구입해 갑니다. 예전에는 장도를 딸 시집보낼 때 혼수품에 걸어줬는데, 요즘에는 남녀가 쌍으로 사갑니다. 남녀가 공히 지조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죠. 장도는 가풍과 부모의 정신을 물려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대(代)를 이어 장도(粧刀)를 만들고 있는 전남 광양 장도박물관 박종군 관장(53)은 "TV 사극에서 장도가 여자들 호신용으로 몸을 지키는 자결하는 개념으로만 나오는데 그건 한 부분에 불과하다"며 "사대부 여인들의 호신용 칼로 알려져 있으나 칼에는 남녀구분이 없다"고 말했다.
장도란, 칼집이 있는 한 뼘 정도의 작은 칼을 뜻한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해 주머니칼 '낭도'라고도 한다. 때론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해 '패도(佩刀)'라고도 부른다. 평소에 몸을 치장한다 해서 한자로 쓸 때도 '치장 장(粧)'자를 써서 장도라 쓴다.
전국에 5곳 정도의 장도제작소가 있으나 규모나 인지도, 작품성, 가업승계 면에서는 '광양 장도'를 으뜸으로 친다. 이곳 장도박물관은 부친 박용기(82·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이 혼신을 다해 일군 터전으로, 지금은 아들 박종군 관장(2대)과 아내 정윤숙씨(50), 아들 남중(22·입대), 건영(16)군까지 3대에 걸쳐 온 가족이 가업을 잇고 있다.
박 관장은 "아버지가 평생 고생하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미대를 가고 가업을 잇게 됐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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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박용기 선생과 아들 박종군 관장이 장도를 만들기 위해 쇠를 달구고 있다. 이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사진이다. ⓒ 장도박물관 |
이처럼 장도제작에 온 가족이 매달리는 것은 대공에서 세공까지 무려 177개 공정을 거치는 고된 작업인 만큼 협업이 아니면 버거운 일이다.
주요공정은 도신(刀身)과 칼자루, 칼집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전부 수작업으로만 하만 효율이 떨어지고 단가가 비싸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장도의 칼날연마는 사포(砂布) 같은 기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고.
그렇다고 해도 1개 만드는데 3~4일이 소요되며, 출품작이나 소장품은 길게는 1개 만드는 데 3년씩 걸린다고 한다. 장도 가격은 일반적인 것은 10만원에서부터 수백,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장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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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박종군 관장이 장도를 만들고 있다. ⓒ 장도박물관 |
전통공예대전에서의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아내 정윤숙씨는 2012년 KDB산업은행 재단이 주최한 공예대전에서 은상을, 최근 담양에서 열린 대나무공예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도의 용도는 △공예품으로서의 실용성 △예물용으로서의 장도 △칼의 문양이나 형태에 따른 장신구 △호신용으로서의 장도까지 크게 4가지로 분류된다.
또한 선조들은 손이 작았기 때문에 과거 기준의 장도는 12~16cm 정도 크기지만, 지금은 키에 비례해 손도 커져 20cm까지도 장도로 분류한다고.
물론 장도박물관에는 장도만 있는게 아니라 1m짜리 환도(環刀) 또는 대도(大刀)까지 다종다양한 300여종의 검이 전시돼 있다. 흔히 '은장도'를 생각하기 쉽지만, 선조들은 신분에 따라서 금·은·동·옥장도까지 다양한 소재로 장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사극에서 사대부 여성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해 은장도로 자신을 몸을 해하는 것을 보고 대다수 국민들은 장도를 '은(銀)'으로만 만드는 줄 알지만, 조상들은 훨씬 다양한 소재를 활용했다. 박 관장은 이에 대해 반문을 활용해 설명한다.
"일반 백성은 주로 옥장도를 갖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시대적 배경상 사대부 여성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한 것이 은장도, 호신용입니다. 평민들은 지조 안 지켰습니다. 사대부 여성이 써서 '은장도'인거죠. 왕비가 '옥장도'로 죽었다는 얘기는 없잖습니까?"
'광양 장도'의 독보적인 작품성은 영화나 사극의 단골 협찬품이기도 하다. 이달 하순 개봉예정인 '조선미녀삼총사'에 하지원이 소지한 칼이 광양장도며,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배우 한효주가 들고 나온 것도 이 칼이다.
SBS 사극 '장옥정'에 출연한 김태희가 지녔던 칼도 광양장도다. 광양장도의 유명세가 '독하다보니' 고유명사화됐다는 게 박 관장의 농이다.
이 같은 장도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990년대 초까지 발행된 당시 국민학교 교과서 '사회과 탐구' 4학년 2학기 본문에는 "각 지방의 전통적인 장도를 찾아 자신의 장도를 만드는데에 참고했으며, 또 새로운 무늬나 재료를 찾아냈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돼 지난 1978년에는 전국의 장도 기술자 가운데 유일하게 중요 무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됐다…."(중략) 이렇게 광양장도와 박용기 선생을 기술했다.
현재 광양 장도박물관은 제1대 박용기 선생의 공방이 있는 곳으로, 박 선생이 지난 2005년 재산과 작품 300여점을 모두 광양시에 기부했으며, 이후 '광양 장도박물관(2006년)'이 세워져 아들(박종군)이 8년째 관장을 맡아 위탁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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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장도박물관에서는 정기적인 체험학습 프로그램이 짜여져 각급 학교의 인기를 얻고 있다. ⓒ 장도박물관 |
박 선생이 재산을 기부한 명분은 "맥이 끊어지면 안 된다"는 사명감 때문. 그러나 광양시는 기증자의 숭고한 뜻과는 별개로 매년 시 보조금 6000만원만 지원해 박물관의 만성적인 적자살림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불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매달 전기요금이 최소 200만원이 넘는 실정이어서 시에서 지원하는 보조금으로는 턱없다는 것이 박 관장의 하소연이다.
박 관장은 "박물관 직원들의 인건비와 공과금, 체험학습 등의 운영비로 연간 1억6000만원이 들어가지만, 시에서는 6000만원으로 묶어놓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전국 120개 전수관 가운데 유일하게 사비로 지탱되는 곳은 이곳 장도박물관뿐으로, 이는 결국 칼을 팔아서 자립하라는 것인데 기증자의 뜻이 훼손되는 것 같다"며 광양시의 문화정책에 서운함을 나타냈다.
인근 여수와 순천에 비해 관광자원이 태부족한 광양시는 장도박물관을 시티투어 코스에까지 넣어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지만, 정작 박물관 재정지원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셈이다.
이에 대해 박 관장은 "아버지는 기술보다는 정신을 강조하셨는데, 적어도 장(匠)이라면 1대 장도장 정신을 이어나가야지 칼을 팔아 수익을 내는 돈벌이는 곤란하다"며 "철강산업은 한마디로 돈벌자고 하는 것일 뿐, 결국은 문화와 교육, 삶의 질이 뒤따라줘야 정주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