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주화의 상징이자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별세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이자 흑인과 백인이 서로 공존하는 무지개 국가를 형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만델라는 1918년 7월18일 남아공 동남부 트렌스케이 시골마을 음베조에서 마을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는 뜻의 '롤리흘라흘라 만델라'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만델라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은사로부터 '넬슨'이라는 이름을 받게 됐다.
만델라는 흑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트헤어대학에 진학하는 엘리트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곧 시련이 닥쳤다. 학생회 대표로 선출된 만델라가 대학당국의 정책에 반기를 들자 대학측이 학생회 대표를 사임하고 정학 처리한 것.
이후 만델라는 무작정 요하네스버그로 상경,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남아공대학(UNISA) 학사 과정을 이수했다. 이 당시 만델라는 변호사 사무실 동료 등 흑인 지식층과 교류하며 백인정권의 흑인 차별정책에 눈을 떴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참여했으며 1944년에는 ANC 청년조직인 'ANC청년동맹(ANCYL)' 창립멤버로 활약했다. 대학 졸업 후 1952년에는 올리버 탐보와 동업으로 '만델라&탐보'라는 남아공 최초 흑인 법률사무소를 열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철폐 운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1960년 3월 발생한 '샤퍼빌 대학살' 사건은 만델라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남아공 당국의 백인정권 탄압정책이 강경해지자 요하네스버그 인근 샤퍼빌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69명이 사망한 것. 백인정권은 같은 해 4월 반공산당법을 발표해 ANC를 불법조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후 만델라는 비폭력 저항운동으로선 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며 ANC 지도부에 무장저항 운동을 펼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그는 '사나운 짐승은 맨 손으로 피할 수 없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해 이 문제를 공식 논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폭력은 더 큰 학살을 부를 것'이란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만델라는 1961년 지하 무장조직인 '민족의 창'을 결성하고 초대 사령관이 됐다. '민족은 창'은 사제 폭탄으로 정부청사와 발전시설을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공격이 실패하자 만델라는 당국의 감시를 피해 1962년 출국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체류한 뒤 비밀리에 귀국했으나 같은 해 8월 경찰에 체포됐다.
이에 따라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만델라는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혹독한 환경의 로벤섬에서 18년, 나머지 9년은 폴스무어 형무소에서 보냈다.
그 사이 망명 중이던 탐보가 이끄는 ANC는 '만델라 석방'에 초점을 맞춰 국제적인 이목을 끄는 캠페인을 벌였다. 대중적인 관심은 국제 지도자들을 움직였고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F.W.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흑인탄압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 만델라를 석방하며 ANC도 합법조직으로 인정했다.
석방된 만델라는 1991년 ANC 총재로 취임하고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후 1994년 4월27일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되며 첫 민주적 선거에서 ANC가 다수당으로 승리해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는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또한 그 해 5월 그의 나이 76세로 만델라는 남아공 역사상 처음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민주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이후 1999년 5년간 단임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퇴임 이후에도 그는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어린이재단, 만델라재단 등을 통해 에이즈 퇴치활동과 어린이 교육을 위해 기금마련과 자선활동에 전념하며 2001년에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음에도 콩고민주공화국과 브룬디 등의 평화협상 중재를 위해 나섰다.
하지만 그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대회를 끝으로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지난 6월 지병인 폐 감염증이 재발해 병원에 입원했던 그는 9월 퇴원했으나 자택에서 의료진을 계속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