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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해외건설 48년 '숨겨진 뒷얘기들'

해외수주 누적 1000억달러 돌파…특유 추진력·도전정신 점철

박지영 기자 기자  2013.11.28 16: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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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현대건설이 지난 22일 중남미지역에서 14억달러 규모 초대형 정유공장 공사를 수주하며 국내 건설사 최초로 해외수주 누계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1965년 해외 건설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48년여만의 쾌거다. 현대건설 직원들이 뽑은 최고의 사연들을 묶어 봤다.

1965년 국내 건설사 최초로 해외 건설시장에 진출한 현대건설. 그 첫 번째 사업은 바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였다. 당시 현대건설이 태국에 가져갔던 장비는 재래식 도로공사 때 사용하던 구식 노후장비. 그나마도 절대다수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불도저나 로더 등 일부장비는 새로 구입하기도 했지만 기능공들이 사용법을 몰라 석 달도 채 안 돼 고장 나고 말았다.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태국의 날씨였다. 하도 비가 자주 내려 모래와 자갈이 항상 젖어있었다. 그대로 섞어 쓸 경우 아스콘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을 정도. 고심 끝에 건조기에 자갈을 넣고 말리기로 했지만 건조기 자체온도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 광경을 보더니 대뜸 "건조기에 비싼 기름 때 가면서 말릴 게 뭐 있느냐, 골재를 직접 철판에 놓고 구워라"라고 지시했다. 신기하게도 건조기 사용 때보다 생산능률이 2~3배 높아졌다.

   첫 번째 해외수주 사례인 태국 타파니 나라티왓 도속도로 공사모습. ⓒ 현대건설  
첫 번째 해외수주 사례인 태국 타파니 나라티왓 도속도로 공사 장면. ⓒ 현대건설

현대건설이 중동에서 최초로 수행한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 때도 유명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공사 초기에는 중동기후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식수가 부족해 콜라로 양치질을 하는 일도 있었고, 합판조각 위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다 12월부터 시작된 우기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애를 먹은 것은 자연환경에 따른 골재 문제였다.

바레인 내륙지방 석산에서 가져온 암석들은 석회질 성분이라 물을 머금으면 곧 흐물흐물해졌고, 바다에서 퍼 올린 모래에는 이물질이 많아 여과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 했다. 또한 모래와 개흙으로 이뤄진 매립지다보니 파일을 박는 일도 어려웠다.

울산조선소를 통해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였지만 외국의 엄격한 기준과 규격을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는 특별했다. 품질관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당시 한국 건설문화 풍토에서 영국과 포르투갈로 이원화된 까다로운 감독은 다소 억지처럼 여겨질 때도 많았다.

처음엔 공기를 맞추느라 요구를 따랐지만 나중에는 우리나라 자재들을 추천해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수공사에 사용하는 5종 시멘트의 경우 충북 단양에서 가져와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덕분에 우리나라 시멘트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나중에는 현지 업체들까지 시멘트를 사기 위해 줄을 서기도 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값싼 골재 구하려 국경 넘나들어

쿠웨이트 슈아이바 항만공사 때 처음 맞닥뜨린 난관은 골재 확보였다. 당시 필요한 골재는 48만㎥, 블록기초 및 호안용 석재가 20만㎥나 됐다. 그러나 마땅한 석산을 찾을 수가 없었다. 쿠웨이트 업자들이 골재를 팔긴 했지만 너무 비싸 힘들더라도 직접 석산을 찾아야만 했다.
 
2개월간 사막을 헤맨 끝에 마침내 골재원을 찾아냈다. 현장에서 150㎞나 떨어진 이라크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골재채취율도 10~20%에 불과했으나 이마저도 다행스러웠다. 이후 현대건설은 덤프트럭으로 현장까지 실어 날랐으나 3개월 정도 지나자 쿠웨이트 정부로부터 골재채취 허가 취소통지서가 날아왔다. 근처에 있던 쿠웨이트 업자들의 농간이었다.
 
이곳 업자들은 자신들의 골재를 현대건설에 판매할 요량으로 수작을 부렸지만 현대건설은 주베일산업항 3호 석산의 돌을 끌어다 쓰기로 했다. 3호 석산에서 현장까지의 거리는 300㎞, 게다가 국경을 넘어야 하는 까다로움이 있었지만 현대건설은 그래도 이 방법을 고수했다.

◆女감독관에 속옷·생리대 선물까지

이라크 바그다드 의료단지 공사가 한창 막바지에 이를 무렵인 1983년 당시 정수현 차장(현 현대건설 사장)은 미국 뉴저지 지점에서 4년여간 근무하다 본사로 복귀했다. 모처럼 가족과 서울생활을 시작하려던 찰나 갑자기 바그다드 의료시설 현장(MECY)으로 출장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이라크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바그다드 의료단지는 거의 준공을 앞두고 있었지만 워낙 까다로운 감독관의 현장검측 때문에 공사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남자들은 전장에 나가 공사현장에는 주로 여성감독관들이 파견돼 있었다. 바그다드 의료단지 감독관 역시 바그다드공대 건축과 출신인 젊은 미혼여성이었다.

하지만 이 감독관의 검수과정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정 차장을 비롯한 현장직원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전쟁 중이라서 이라크에는 생필품이 모자랍니다. 여자 감독관이니까 여성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선물해 보세요."

이 같은 영국 감독관 부인의 조언에 정 차장은 무릎을 탁 쳤다. 그 후 업무나 휴가차 한국본사와 이라크현장을 수시로 오가는 직원들을 통해 여성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긴급 공수했다. 손수건, 테이블보, 기초화장품, 스타킹, 속옷, 심지어는 생리대까지 들여왔다.

   중동 첫 진출 공사인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공사현장. ⓒ 현대건설  
중동 첫 진출 공사인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공사현장. ⓒ 현대건설

말레이시아 페낭대교는 1985년 완공 때만 해도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다리였다. 입찰경쟁 당시부터 이미 건설부문에 있어서는 글로벌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입찰에 참여한 회사는 현대건설을 포함한 △호주 1개사 △프랑스 5개사 △독일 3개사 △일본 13개사 등으로 세계 유수 건설사들이 대거 참여해 각축전을 벌였다.
 
당시 가격 면에서만 따질 경우 입찰 참여회사 중 프랑스 캄프농 베르나사가 최저입찰로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이 업체의 공기보다 1년 앞당긴 3년을 제시하며 수주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가격을 내리지 않는 대신에 공기를 앞당겨 통행료를 1년간 더 받게 될 경우 훨씬 이득이라며 말레이시아 정부를 설득시킨 점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페낭대교 현장에서는 휴일도 퇴근 시간도 없었다. 일요일인데도 현장소장이 나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개흙에 들어가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것을 본 말레이시아 기자들은 다음날 신문에 '한국 사람들은 Around the-clock'이라는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실어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0만달러 불도저, 뻘 속에 매장된 사연도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 2단계 공사는 제3 활주로를 만들기 위한 부지매립공사였다. 현대건설은 약 17년 동안 매립공사를 통해 싱가포르 전체 국토의 6%에 해당하는 면적을 확장하는 데 공헌했다.

기존 실트폰드 매립공사는 시멘트고결공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뻘에 시멘트를 살포해 지반을 탄탄하게 만드는 공법이었다. 그런데 이 경우 시멘트가 너무 많이 소모돼 공사비 부담이 컸다.

이때 현대건설 토목분야의 기술진은 모래살포공법과 고강도 보강매트 포설공법을 병행하기로 했다. 모래살포공법은 실트폰드에 전체적으로 5㎝ 정도씩 모래를 깔아 침전시킨 후 그 위로 올라오는 수분을 제거하는 방법을 반복 실시해 연약지반을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여러 번에 걸쳐 4~5m 정도 모래를 살포했을 때였다. 이때는 불도저가 들어가도 뻘 속으로 빠질 염려가 없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실트폰드 중앙 어떤 지점에서 모래를 살포하던 불도저가 한쪽으로 기우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순간 불도저를 운전하던 태국인 근로자가 재빠르게 뛰어내려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불도저는 기울기 시작한 지 몇 분도 안 돼 자취도 없이 뻘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자칫하면 인명사고로 이어질 뻔한 것.

결국 이 사건은 20만달러 상당의 불도저 한 대를 뻘 속에 매장시키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대건설은 모래살포법 덕분에 2000만달러 상당의 이득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