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정치란 정의실현을 목적으로 한 사회적 행위이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며 정치가 국민을 위해 이뤄지는 정치제도다. 따라서 민주정치는 특정계층이 아닌 모든 국민을 위한 정의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국민이 국가기관의 대표나 장을 직접 뽑고,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므로 권리와 의무가 같다. 입법·사법·행정기관의 대표를 뽑고 각각 권력의 균형, 삼권분립을 유지하는 것도 결국 국민의 정의로운 생활을 꾀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사회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과정으로 실현되는가? 정치, 사회교과서는 '정의'를 실질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로 구분한다. 정치가 국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시스템이라면 최종적으로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 정의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정의롭지 못하면 그것도 문제다.
국가마다 경제나 사회의 발전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실질적 정의의 최종 수준은 다르기 마련이다. 예컨대 우리 국민이 누리는 복지혜택은 유럽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국민들은 유럽인의 복지수준을 부러워할지언정 거기에 빗대어 우리의 결과를 무조건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종 결과가 모든 국민들의 평등한 참여와 공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면 승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치가 어렵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지난 2월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8개월여간 끌어온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은 절차적 정의의 파괴란 점에서 민주주의 근본이념을 훼손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행정부의 대표를 뽑는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기관이 특정 정치집단을 위한 선거운동에 나선 것은 정의 실현과정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위반한 부정행위다.
현재까지 밝혀진 결과는 국가정보원은 물론 국군사이버사령부 등 다수의 국기기관이 인터넷을 통해 여당 대통령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조사 결과 국정원 직원의 대선개입은 물론 일반인을 동원한 혐의도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정보원 심리전단 직원 최소 22명이 트위터상에서 무더기로 선거에 개입했고, 활동 결과를 주기적으로 팀장에게 보고했다.
더구나 민간영역의 활동이 금지된 국군 사이버사령부 소속 군인들이 국정원과 공조해 '선거개입 댓글'을 퍼 나르는 등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민주주의의 근본이념 훼손은 물론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억압통치가 교묘한 형태로 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국제적 논란거리인 미국의 세계 각국 도청을 이른바 감시를 목적으로 한 '빅브라더'의 실현이라 한다면 이번 사건은 '여론의 직접적 조작'이란 점에서 그 파급효과는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한 현 정부의 태도도 문제다. 선거 당사자인 박 대통령은 수 개월간 침묵을 지키다 최근에서야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으며,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는대로 조치를 취할 것이고 재발 방지책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선 당사자의 선거개입 지시와 선거활용여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박대통령의 말을 믿고 싶다. 보통사람으로서의 박대통령의 상식과 교양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움여부는 선거당사자가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비록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선거기관이 정한 규정을 어긴 선거운동이 있었다면 당연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정보화 사회에서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영향력은 사람 목숨을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가진다. 그런데도 자신을 지지하는 인터넷 내용이 선거에 도움되지 않았다는 것은 시대를 읽지 못하는 문외한이거나 전후관계를 잘못 파악한 결과다.
하다못해 초등학교 회장선거에서도 자기 선거운동원이 부정을 했다면 당사자가 사과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한편 사법부 판단이 내려진 후 조치를 하겠다는 내용도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법적 책임은 민주사회의 최종 해결책이다. 법원 판결 승복은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국민이면 누구나 당연히 따라야 하는 마지막 절차이다. 그런데 개인의 행위와는 달리 행정기관은 법이 정한 규정에 따라 행동하게 돼있는 공공조직체다.
행정기관 공무원이 규정을 어기면 법의 판단이전에 관계기관의 제제를 우선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를 위해 각급 행정기관은 사정기구나 감사관제도를 운영한다. 해당 구성원의 불법비리를 해당기관의 장이 감시하게 돼 있는 것이 현행 민주사회의 국가정책이다.
극단적으로, 모든 사안마다 법원의 판단에 따른다면 행정기구의 공무원이 할 일은 없다. 그래서 행정기관의 대표는 문제가 된 직원들의 부정행위를 감사하고 판단 내려 조치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 법원의 최종 판단에 맡기겠다는 것은 기관장의 임무를 방기하는 무책임에 다름 아니다.
국가정보원은 대통령직속기구로 대통령이 관장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청와대 등 사정기관은 늦었지만 이제라도 해당 기관의 실상을 파악, 기관장으로 할 조치를 다해야 한다.
또 하나 이번사태에서 제기될 점은 국가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상실이다. 개인 간 신뢰는 물론 비개인적 차원의 '추상적 신뢰'는 그 자체가 비용이며 사회적 이익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개인이나 정부기구가 보편적인 규범을 준수해 예측 가능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리라는 기대로부터 신뢰는 싹튼다.
상호 간 신뢰를 바탕으로 국민들이 협동한다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불신이 만연할수록 사회적 거래 비용은 증대하고 공동이익을 실현할 기회는 줄어든다.
따라서 불신 사회에서 사람들은 협동하지 않는 반면 적자생존의 경쟁과 제로섬적인 갈등에 몰입하게 된다. 불신사회에서 국민들은 무익한 협동 대신 기만과 협잡, 배신 등을 통해 이익을 추구한다. 불신 사회에서 타인을 신뢰하는 사람은 불행하고 그래서 삶은 매우 암울하다.
문제가 불거진지 벌서 8개월이 지나도록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해 국민들의 불신만 쌓이고 있다. 매주 서울광장에 수천명이 모여 '실체규명'을 외치지만 정부의 대답은 오리무중이다. 수천명의 인력이 생산적인 곳에 투입되지 못하고 허공에 분노만을 쏟아 놓는 것 자체가 국가경제의 손실 아닌가. 최근 국회일각의 특별검사 도입 주장도 실체규명 차원에서 제기될 방법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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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못하는 사태로 번지기 전에 정부의 투명한 조치를 기대해 본다.
소정선 논설위원(前 코리아헤럴드·헤럴드경제 기자, 디저털 '말' 편집국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