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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해부] 두산그룹…① 태동과 성장

국내 최고(最古) 대기업, 역사 속 '배오개' 역전의 '두산'

이보배 기자 기자  2013.10.01 10: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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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반대로 몰락의 나락에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파악해보는 특별기획 [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두산그룹을 조명한다. 그룹의 태동과 성장, 계열사 지분구조와 후계구도 등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두산그룹의 역사는 한국의 개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1896년 8월 면직물을 취급하는 '박승직상점'으로 시작됐다. 당시 33세의 젊은이였던 박승직 창업주는 서울 배오개(종로4가)에 박승직상점을 열었고, 그 무렵 서민들에게 뛰어난 품질과 신용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배오개 거상'이라는 별명을 괜히 얻은 것이 아니었다. 배오개의 작은 가게는 훗날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두산그룹과 한국기업의 근대사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17년 역사의 시작 '박승직상점'과 '두산'

박승직상점은 날로 번창해 각 지방에 지점까지 열게 됐고, 그 뒤를 따라 여러 민족기업들이 탄생했다. 이때부터 한국기업의 본격적 개화가 시작된 셈이다. 박 창업주는 1905년 일제의 화폐개혁에 맞서 동대문시장 상인들로 구성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06년 지금의 한성상업회의소 설립에 참여했는데, 이 회의소는 훗날 대한상공회의소의 효시가 됐다.

  두산그룹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박승직상점. ⓒ 두산그룹  
두산그룹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박승직상점. ⓒ 두산그룹
하지만 박 창업주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일본에 의해 화폐정리가 시작되면서 조선 돈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면직물 포목시장도 점점 경쟁력을 잃어갔다. 이때 박 창업주의 재기에 도움을 준 것은 그의 부인 정정숙 여사였다. 1915년 정 여사가 부업 삼아 재래식 분을 만들어 근대식으로 포장해 판매한 게 '대박'을 터뜨린 것.

일제 화장품이 판을 치던 1916년 정 여사는 국내 최초로 '박가분'을 내놓았다. 국산으로 제작된 박가분은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미백효과로 하루 매상 4200원(당시 쌀 700가마니)을 올리며 불티나게 팔렸다. 1925년 박승직상점이 주식회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박가분 효과가 컸다.

승승장구하던 박승직상점은 1936년 장남 박두병 초대회장이 박승직상점 취체역(지금의 상무급)으로 취임하면서부터 2세 체제가 시작됐다. 남의집살이도 해봐야 된다는 선친의 뜻에 따라 박 초대회장은 조선은행에서 3년간 근무한 뒤 박승직상점에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이후 1946년 박 초대회장은 박승직상점의 명칭을 종합물산회사인 '두산상회'로 바꿨고, 이대부터 두산의 현대사가 시작됐다. '두산'이라는 새로운 회사명은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올려 산같이 커져라'라는 박 창업주의 뜻이 반영됐다.

그런가 하면 8·15 광복은 두산이 도약하는 전환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시 미 군정청은 한국 내 일본인 재산을 처분하면서 쇼와기린맥주 관리인에 박 초대회장을 지명했다. 박 초대회장은 이미 1942년부터 쇼와기린 대리점을 운영해왔다. 그는 1948년 회사이름을 동양맥주로, 상표는 'OB'로 바꿨고, 미 군정청이 물러날 때 동양맥주를 34억원에 사들였다.

◆1960~70년대 본격 성장, 1990년대에는…

1952년 정부로부터 동양맥주를 인가받은 박 초대회장은 이후 모기업인 두산상회의 상호를 '두산산업'으로 변경했다. 1960년에는 두산건설의 전신인 동산토건에 이어 1966년에는 코카콜라를 제조한 한양식품을, 1967년에는 두산메카텍의 전신인 유한공업사를 설립해 그룹 외형을 꾸준히 확대, 일류기업 두산의 기초를 만들었다.

 

   배오개 거상으로 불린 박승진 두산 창업주. ⓒ 두산그룹  
배오개 거상으로 불린 박승직 두산 창업주. ⓒ 두산그룹

이후 1970년대에는 생활문화산업의 선두주자로서 위치를 굳건히 했고 소비재산업, 무역과 건설, 기계, 전자사업에서도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게 됐다.

1974년에는 축산업 개발업체 두산개발을 세웠고, 1978년에는 그룹 명칭을 OB그룹에서 두산그룹으로 개명한 뒤 종합광고회사인 오리콤을 출범시켰다.

이후 1985년 두산동아의 전신인 동아출판사를 인수했고, 1994년에는 두산정보통신을 세우는 등 운송, 인쇄, 염전 등의 사업으로 진출,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러나 욕심이 과했던 것일까. 거침없는 성장세를 이어온 두산은 1990대 중반을 넘기면서 휘청거렸다. 식품, 출판, 건설, 기계, 전자 등 과도한 사업다각화 속에 주력사업인 맥주 사업이 조선맥주(현 하이트맥주)에 추월당해 적자에 빠지는 등 사업부진이 계속됐던 것.

두산은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부터 결단을 내렸다. 오너 일가는 3M, 네슬레, 코닥 등 핵심 합작사 지분매각, 코카콜라 영업권 양도, 계열사 사옥·토지 매각 등 뼈아픈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두산만의 '선택'과 '집중'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98년에는 그룹의 모태인 동양맥주를 벨기에 '인터브루'에 넘겼고, 그룹의 상징이었던 서울 을지로 사옥도 팔았다. 당시 재계 일각에서는 "두산이 이제 망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발 후퇴는 훗날을 위한 힘을 비축하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선제적 구조조정으로 현금흐름을 개선함과 동시에 넉넉한 현금 확보도 가능하게 됐다.

이후 두산은 새로운 미래 성장동력을 찾아 나섰다. 두산이 새롭게 눈을 돌린 분야는 인프라 지원사업이었다. 도로, 철도, 항만, 공항 등 기존 사회 간접시설뿐만 아니라 에너지, 국방, 생산설비, 물류와 운송설비까지 망라하는 인프라지원사업은 세계시장 규모가 연간 수천조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포기 모르는 오뚝이정신으로 다시 한 말(斗)씩 쌓은 산(山)

첫 출발은 2001년 두산중공업의 전신인 한국중공업 인수였다. 당시만 해도 소비재사업을 하던 두산이 중공업을 맡을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두산의 선택은 단호했다.

   두산그룹 본사 사옥. ⓒ 두산그룹  
두산그룹 본사 사옥. ⓒ 두산그룹
두산중공업은 저수익사업이었던 제철, 화공사업을 정리하고 발전, 담수 등 핵심사업에만 역량을 집중, 두산의 100년 경영능력을 접목시켰다. 그 결과 2000년 매출 2조4000억원 순손실 248억원이던 회사는 2008년 매출 5조7097억원에 영업익 4744억원을 기록, 우량기업으로 재탄생했다.

이어 두산은 2003년 두산건설의 전신인 고려산업개발, 2005년에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전신인 대우종합기계를 각각 인수하며 중공업그룹으로 도약했다.

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담수설비(두산하이드로테크놀러지), 발전소 보일러(두산밥콕), 친환경 엔진(미국 CTI), 소형 건설장비(밥캣) 등 원천기술을 확보한 외국 회사들도 차례로 인수했다.

담수설비, 보일러 부문에서 원천기술을 확보한 두산중공업은 발전분야로 눈을 돌려 2008년 이산화탄소 포집 저장 원천기술 보유업체인 캐나다 HTC사 지분 15%를 사들이면서 이 기술을 확보했다.

또 2009년에는 터빈 제조분야에서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체코 스코다 파워 인수를 통해 보일러-터빈-발전기로 이어지는 '풀 라인업'을 구축했다.

이후에도 두산은 발전소 보일러 제조업체인 인도 AE&E 첸나이웍스, 독일 AE&E 렌체스 등을 인수해 발전설비 관련 원천기술 확보와 시장을 넓혔다.

소비재에서 중공업으로, 내수기업에서 글로벌기업으로 변화와 성장을 계속한 두산그룹은 2013년 4월 기준 자산총액 약 30조원대로 대기업 집단(공기업 제외) 순위 12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