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이슬람금융 톧아보기⑤] 진화하는 중동 비즈니스 '포스트오일 시대' 대비해야

중동건설 진출 '최초의 한류'…"이젠 토탈솔루션 운영기술 필요"

최민지 기자 기자  2013.09.03 14:05:02

기사프린트

[프라임경제]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수백 개의 횃불이 타올랐다. 사우디 내무성과 제다시 관계자들이 제다공항에서 메카방향으로 향하는 2km 길이의 공항로 확장 공사를 40일 이내에 완공시키라고 급히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성지순례 기간에 무슬림 150만명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조속히 공항로를 완공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촉박한 일정을 맞추고자 8시간 3교대 작업으로 24시간 작업을 펼쳤다. 가로등이 없는 상황에서 횃불을 밝혀가며 야간작업에 돌입했다. 이를 목격한 파이잘 사우디 국왕이 크게 감동받아 후속공사를 이 건설사에게 맡기라는 특명을 내렸다.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1970년대 중동개발을 이끈 삼환기업이 제다시 1차 미화공사 현장에서 겪었던 실화다.

세계 곳곳에 뻗어있는 국내 건설업계 명성 밑바탕에는 40여년 전 도전정신으로 '맨 땅에 헤딩'하듯 중동지역에 진출한 1세대 기업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국내 최초로 중동에 진출한 삼환기업. 고 최종환 회장은 건설 1세대의 주역이자, 국내건설사들이 중동에 진출할 수 있게끔 처음으로 포문을 연 인물로 평가된다. 1970년대 당시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최 회장은 오일머니가 풍부하지만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이뤄지지 않던 중동·아프리카 지역을 선택했다.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이었다.

삼환기업은 사우디에서 입찰 성공 후에도 한국 건설업체의 기술능력과 신용도를 믿을 수 없다며 계약을 파기당하는 등 여러 고초를 겪었다. 네 번의 시도 만에 1973년 사우디 알 울라-카이바 간 도로공사를 수주할 수 있었지만, 착공 후에도 용수부족·라마단기간·현지 인력의 낮은 노동력 등 다양한 문제가 터져 나왔다.

삼환기업은 구덩이를 파 빗물을 모아 용수로 사용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무사히 공사를 마쳤고, 이후 사우디 정부로부터 현재까지 이뤄진 도로공사 중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해외수주 '중동' 95% 달하기도

이와 함께 중동진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업으로 현대건설을 꼽을 수 있다. 현대건설 창업자 故정주영 회장의 '해보기나 했어?' 정신은 중동진출에도 적용됐다.

1970년대 사우디는 중동 전체의 건설공사 중 약 35%를 발주해 전 세계의 유수한 건설사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곳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중동진출과 관련해 찬반논란이 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 회장이 내놓은 답변은 현재까지 계속 회자되고 있다.

   쌍용건설이 건설한 주메이라에미리트타워호텔. ⓒ 쌍용건설  
쌍용건설이 건설한 주메이라에미리트타워호텔. ⓒ 쌍용건설

"비가 오지 않으니 일할 시간이 늘어나서 좋고, 낮이 더우니 밤에 일하면 되겠다. 사막이라 모래, 자갈을 공짜로 얻을 수 있고, 물은 다른 곳에서 실어오면 된다."

이후 현대건설은 경쟁업체들의 회유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1976년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했다. 공사금액만 9억6000만달러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대규모 공사를 통해 현대건설은 다방면의 기술을 습득하고 지속적인 해외진출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허경신 해외건설협회 지역2실(중동) 실장은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단일 공사로 9억달러를 수주한 당시 세계 최대 공사였다"면서 "재무부 장관이 달러 부족으로 세계 각국을 돌며 3000만달러 정도를 수주하고 있을 때였으니 얼마나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였는지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 후 중동의 오일머니는 더욱 풍족해졌다. 중동국가들은 확보한 달러를 이용, 주택 및 도로 공사 등 인프라 확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때 국내건설사들의 중동호황기가 시작된다. 이로 인해 중동지역 내에서 한국건설에 대한 인지도와 신뢰도가 향상됐고, 이를 두고 한류의 시초가 건설이라는 해석도 등장하고 있다.

중동호황기의 정점을 찍은 1980~1983년에는 전체 해외진출 수주액 대부분을 중동지역이 차지했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1980년 전체 해외진출 수주액 82억5937달러 중 중동수주액은 78억3104달러로, 중동지역 비중이 94.8%에 달했다. 1981년부터는 수주액 100억달러를 넘는 기염을 토한다.

◆이슬람금융 도입, 건설사 해외진출 긍정적 영향

1970~80년대 토목공사 위주로 중동에 진출한 국내건설업계는 2000년대부터 고부가가치 플랜트 기술과 대형 프로젝트로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현재 중동의 굵직한 현장에선 '코리아 파워'를 엿볼 수 있는데, 그 중 삼성물산이 건설한 '부르즈 칼리파(당시 명칭은 버즈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UAE)의 랜드마크다. 이는 현존하는 최고층 건축물(828m)로 국내 순수기술로 이뤄낸 걸작이다. 쌍용건설은 두바이의 대표적인 3대 호텔 중 에미리트타워호텔과 그랜드하얏트호텔을 수주, 시공해 '쌍용'이라는 브랜드를 중동에 각인시켰다.

   현대건설이 건설한 주베일산업항. ⓒ 현대건설  
현대건설이 건설한 주베일산업항. ⓒ 현대건설

이와 함께 한국전력공사를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은 2009년 12월 역대 최고수주액(186억달러)인 UAE 원전공사를 선진국들과의 경쟁에서 국내 기술력으로 당당히 수주했다. 또 국내건설사가 해외에서 수주한 주택·도시건설 분야의 단일 프로젝트 가운데 최대 규모로 평가하는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공사를 지난해 5월 한화건설이 수주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허 실장은 "이제 중동에서 고려할 사항은 포스트오일 시대 이후의 움직임이다. 석유에 의존하는 중동 각국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취하는 변화에 우리가 잘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국내 건설업계가 현재 주력하는 토목·건설·플랜트 뿐 아니라 운영까지, 토털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어 그는 "최근 카타르나 아부다비 등에서 국부펀드 및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공통투자를 하자는 제안도 들어와 이슬람금융이 도입된다면 국내건설사들이 해외로 진출하는 데 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조언했다.

◆장민석 과장의 쿠웨이트 생생이야기: "OK는 '알았으니 그만해라'의 부정어

현대건설 본사에서 처음 만난 장민석 경영지원본부 인사과장은 전형적인 현대맨이었다. 달리 말하면, 노련한 비즈니스맨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적당한 체격에 날렵한 얼굴선은 그의 커리어를 더욱 살려주는 듯 했다. 쿠웨이트에서 귀국한지 1년이 넘은 만큼 당시 뜨거운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제 색을 찾았지만 생생한 현장의 기억은 그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2010년 9월 쿠웨이트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은 장 과장은 설렘 가득한 마음을 안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처음 밟은 쿠웨이트 땅에서 그는 자유로움 보다 낯선 아시아에서 온 동양인으로서의 소외감을 더 크게 느꼈다.

그런 그에게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국내건설사들의 흔적은 한국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 현대건설은 쿠웨이트에서 현재까지 총 62건의 공사로 약 100억달러 이상을 수주했다. 출·퇴근할 때 들리는 관공서, 쿠웨이트 북부의 도시와 남부 슈아이바지역을 연결해주는 파하힐 고속도로 등 현대건설이 참여한 공사 결과물을 볼 때마다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장민석 현대건설 경영지원부 인사과장의 쿠웨이트 근무 시절 모습. ⓒ 현대건설  
장민석 현대건설 경영지원부 인사과장의 쿠웨이트 근무 시절 모습. ⓒ 현대건설

타지생활에서 장 과장을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 우리나라와 다른 업무스타일이었다. 현장에서 일하며 문화가 달라 곤란했던 적도 비일비재했다.

장 과장은 비자발급부터 인력동원 등 총무·노무 업무를 주로 맡았었는데, 특히 라마단 기간에는 일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처리해야 할 업무량은 항상 똑같지만 무슬림들은 이 시기에 현지 근로기준법 상 근무시간이 기존 8시간에서 6시간으로 단축되기 때문이다. 또한 무슬림들은 단식에 따라 일에 대한 의욕도 평소보다 낮아져 쌓여가는 업무로 그는 속이 타들어 갔다.

업무를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슬림 직원들을 독려하며 현장을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쉴 수 있는 기간이라 여긴 비무슬림 직원들이 무슬림이라 사칭하는 일까지 벌어져 생산성과 업무속도는 50% 가량 떨어지곤 했다. 노동력과 시간이 비례하는 공사현장은 답답함만 맴돌았다.

언어로 인해 벌어진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업무 협의 후 "OK, Sir! OK! OK"를 당당하게 대답하는 직원에게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다반사였다는 것. 일례로, 한 번은 회계 대리가 현지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직원에게 급히 세무감사 관련 전표정리 업무를 지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확인해 보니 업무가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 분명 'OK'라는 답변을 받았었는데 말이다.

알고 보니 이는 'OK'를 'Yes'라는 의미로 오해해 벌어진 일이었다. 현지에서 'OK'는 '들었다' 또는 '알았으니 그만해라' 정도의 부정어로도 사용됐던 것이다. 장 과장은 이를 국내로 복귀할 때가 돼서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업무적으로는 부딪히는 일도 많았지만 쿠웨이트 현지 동료들은 낯선 타국 땅에서 혼자 지내는 장 과장을 살뜰히 챙겼다. 현지 직원들은 행여나 그가 외로울까 집으로 초대해 환대했고 그는 자주 직원 가족들과 어울리며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눴다. 심지어 가족모임에 그를 부르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

장 과장이 현지 직원들을 이끌고 한국음식점을 찾는 일도 많았다. 한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들 외에도 쿠웨이트 노동부 등 관공서 관계자들과도 돈독한 친구관계를 유지했다. 현지인들과 우호적인 관계 덕분에 공사현장 인력들의 워킹비자를 받는 데 있어서도 신속한 처리가 가능했다. 현지 친구들과의 사이는 한국에 와서도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쿠웨이트 노동부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친구가 국장으로 승진했다는 기쁜 소식도 전달 받았다.

마지막까지 쿠웨이트 현지 친구들은 장 과장의 한국 복귀 소식에 그를 집으로 초대해 가까운 친지마냥 호의를 베풀며 환송회를 해주었다. 언어도, 문화도 많이 달랐지만 그간 사람들 사이에서 쌓인 정은 한국으로 귀국하는 그에게 큰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처음에는 깐깐해 보이지만 한 번 연을 맺으면 신의를 통해 누구보다 끈끈해지는 쿠웨이트인들. 한국에서 날아온 이방인이 날씨도 토양도 모든 것이 한국과 다른 쿠웨이트에서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