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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의 역사 돋보기] 한국 제1호 교회, 새문안교회

안천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기자  2013.07.02 11: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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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새문안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제1호 교회이다. 광무황제 24년인 1887년에 세워졌으니까 약 130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말기에 세워진 교회이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이 이 해에 미국으로 부임했다. 그러니까 한미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시작된 때에 세워졌다.
 
새문안교회를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에 런던에서 태어났고, 1872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 후 뉴욕대학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4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뽑혔다. 그리하여 1885년 4월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와 함께 인천에 상륙했다.
 
언더우드는 선교사로 조선왕국에 부임했으나, 결코 낯선 이역만리 타지에서 쉽게 선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선교활동을 위해 황해도의 유력인사 서경조를 찾게 된다.

서경조는 원래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압록강 가에 위치한 의주는, 당시 청나라로부터 해외문물이 유입되는 가장 개화된 도시였다. 요즘에는 일제 강점 이후에 부산이 커졌으나, 예전에는 의주가 아주 큰 도시였다. 그래서 일본은 의주 옆에 신의주를 만들며, 의주를 견제하는 지역탄압을 하였다.
 
그의 형 서상륜은 일찍이 만주땅에 가서 세례를 받았고, 귀국하여서는 전도활동을 했다. 그러므로 서상륜이 예배를 본 곳은 사실상 한국 최초의 교회라고 하겠다. 그러나 당시 국법을 어기고 예배를 본 것이 관청에 알려져 황해도로 도피한다.

서경조도 형을 도와 전교를 하다가, 황해도 장연군 송천으로 형과 함께 이사를 했다.   

당시 서경조는 대외무역을 활발히 하여, 재력을 확고하게 갖춘 거상(巨商)이 되어 있었다. 언더우드가 선교사 활동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주목한 사람이 서경조이다. 서경조는 해외문물에 눈을 뜨고 개화사상을 가진 재력가였으므로, 서경조의 집을 찾아 간 것이다.
 
언더우드는 초기에는 서경조의 사랑방에서 계속하여 기거하며 선교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경조의 사랑방이 있는 사랑채 건물이 한국교회의 시원적 교회가 된다. 그래서 그곳 토착지명 이름을 따서 ‘소래교회’라고 불렀다.
 
그 후 언더우드는 서울로 옮겨서 서경조와 함께 새문안교회를 만들었으니, 오늘날 새문안교회를 한국 제1호 교회라고 일컫는 역사가 된다. 오늘날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가 세운 교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한국 최초의 교회는 서상륜, 서경조가 세웠던 의주의 교회이고, 다음으로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가 두 번째이다. 그 후 언더우드와 서경조 등이 서울에도 교회를 세울 결심을 하고서 새문안교회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를 자유롭게 믿을 수 없던 때라, 서경조의 역사는 쓰지 않았다. 언더우드의 역사만 기록에 남겨 놓았다. 그래서 미국인 선교사가 최초의 교회를 세운 것이 되었고, 새문안교회가 최초의 한국 교회가 된 것이다.

생각하면 소래교회와 새문안교회는 사실상 일심동체 같은 교회이다. 현재의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으니 옛 교회는 벌써 사라졌을 텐데, 여건이 가능하다면 소래교회 옛터에 신식 첨단 교회를 새로 지어 줄 마음도 있을 듯하다.
 
황해도 장연 앞의 바다가 몽금포이고, 그 끝이 장산곶이다. 그 몽금포 앞 바다가 유명한 인당수로서 효녀 심청이 몸을 던져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한 곳이다. 그 건너에 백령도가 있는데, 백령도에는 현재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초기 교회가 존재한다.

초기의 한국 교회 역사 정리가 불분명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점도 있으나, 백령도에 거의 최초 수준의 오래된 교회가 있음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백령도는 서양문물이 선박을 통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또 가까이에 언더우드가 찾아간 황해도 장연이 있음을 유의해야 하겠다. 비행기가 없이 선박을 많이 이용하던 100여 년 전에는 백령도가 교통의 요지였다.

그 건너 중심지인 장연이 크게 번창하며 효녀 심청전 설화가 탄생할 필요충분조건이 확실하게 갖춰져 있다.
 
새문안교회는 원래 현재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정동에서 출발한다. 그러다가 한두 번 이사를 하며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런데 새문안교회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왜냐하면 새문안교회는 예전의 원형이 계속 사라졌다.

초기의 모습이 그대로 존재하며 교회가 발전해야 했으나, 계속 허물며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의 새문안교회 건물은 1972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그 건물을 설계한 때와, 그 건물을 설계한 인물이 범상치 않다. 1972년은 바로 일제강점을 실질적으로 극복한 초기 시대를 말하는 것이며, 그 건물은 대한황실의 정통 맥을 잇는 이구 황태손의 건축 작품이라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1945년에 일제강점에서 벗어났으나, 봄이 오되 봄이 온 것은 아니었다. 생지옥살이 이후에도 6.25전쟁, 4.19, 5.16의 격동기를 지나 1972년 무렵에야 실질적 신시대를 열게 됐다.

그 때에 세워진 새문안교회 본당건물은 현대사를 확고히 증언하면서 현존하는, 대한황실의 귀중한 역사유적이다.
 
이구 황태손은 일제의 대한황실 탄압 악행으로 광무황제와 명성황후가 비참하게 시해를 당하시고, 그의 부친인 황태자 영왕이 평생 인질로 잡혀 있다 식물인간으로 귀국한 비극을 증명하는 마지막 역사 인물이다. 그가 귀국한 것은 그 무렵에야 겨우 대한황통 직계손이 모국 땅을 밟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가 귀국하자 설계한 새문안교회는 최초의 실질적인 일제극복을 선언한 것이며, 실질적인 항일독립을 선언하는 건물로 지은 작품이 된다.
 
그러므로 현재의 본당 건물은 개신교가 우리민족을 사랑한 ‘애국애족 전통’을 이어 받아, 이구 황태손의 작품으로 건축되었다고 해석된다. 새문안교회가 서경조 가문의 항일애국을 토대로 세워졌고, 이구 황태손이 그 무렵에야 귀국해서 나라의 정통혼을 새로 정립한다면서 지었던 기념물이라고 하겠다.
 
한국 땅에 교회는 흔하고 많아도, 항일애국의 빛나는 역사를 바탕으로 대한황실 황태손이 직접 설계한 유일한 교회가 현존하는 새문안교회 건물이다. 서양식에 한국 전통미가 돋보이는 건축 예술품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고, 한국 건축사에도 굵은 발자취를 남기는 작품이다.
 
벌써 40여년이 지났으니, 이구 황태손이 미국에서 귀국한 초기에 새문안교회를 그의 작품으로 만들도록 한 교회의지는 이미 흘러간 역사가 되었다. 미국과 한국은 언제부터 동맹국인가?

통상 6.25 전쟁을 말하지만, 이미 새문안교회가 창립된 130여 년 전에 씨앗이 뿌려진 것은 아닐까? 1972년에는 그 것을 재확인한 것과 같다.
 
미국 교회는 긴 동안을 우리민족과 아픔을 나누며, 항일전쟁 동지의 길을 걸어 왔다. 미국의 태평양전쟁, 6.25전쟁 참전의 핵심 이유에는 한국 수호 의지가 뚜렷했다. 새문안교회를 이구 황태손의 작품으로 건축할 교회의지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 하겠다.
 
그런데 정말 아쉽게도 40여년 된 그 훌륭한 건축예술 기념물을 헐고, 새로 현대식 고층빌딩 교회를 짓는다는 충격적인 놀라운 소식이 들린다.

흡사 우리나라 곳곳에서 약 20여년만 지나면 아파트를 재건축하여 웃돈을 얹어 부동산 재테크를 하듯 하는 충격적 소식이라고 말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이 아주 짧은 일이라 하겠다. 일반 보통 건물도 그런 경우에는 비난을 받는데, 현재의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본당 건물은 그대로 보존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고층빌딩은 다른 장소에다 지으면 된다.

교회 건물도 신구 조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있고 혼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 나라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다. 과잉으로 많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하지만 역사성 있는 ‘문화재’로 당당하게 내세울 교회 기념물이 어디에 있는가? 거의 새문안 교회가 유일할 정도이다.
 
기나긴 역사가 있는 한국 최초의 제1호 교회를, 새로 세워지는 신흥교회와 같이 새로 짓기만 한다고 좋은 일은 결코 아니다. 다른 교회들은 새문안교회와 같은 당당한 역사가 없어 열등의식이 배경에 깔려 있다. 그래서 그 자격지심으로 흡사 졸부들 같이 대형건물을 경쟁적으로 짓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세인의 여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새문안교회와 같이 역사성 높고 뼈대 있는 교회가, 기업형 신흥교회와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훗날 크게 후회할 일이 분명하다.
 
새문안교회는 현재 그대로의 상태에서, 이미 최고의 국가 문화자산이다. 최초의 제1호 교회인데다가, 마지막 임금님 황통을 잇는 분이 남긴 회심의 역작이다. 더구나 매우 우수한 예술 작품으로, 건축사에 남을 건물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어떤 교회가 대한황실의 황태자, 황태손의 작품으로 지어진 문화재가 있는가?
 
생각하면 너무 아쉬운 일인데, 황해도 장연의 옛 교회는 이북 공산체제에서 제대로 존재할 리가 없다고 보인다. 그런데 백령도의 교회도 약 20년 전에는 역사성 높은 ‘초기 교회의 원형’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아담하며 고졸한 모습을 갖고, 흡사 수줍고 예쁜 시골 소녀 같은 교회였다. 너무나 정감이 넘치는 멋진 문화재였지만, 현재는 그 훌륭한 문화재를 무참하게 헐고서 지극히 평범한 시골 교회로 다시 지었다. 유구무언 이다.
 
옛 모습을 기억하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실망하며 개탄한다. 문자 그대로 문화실조의 현장이다. 현재의 백령도 교회에는 한국 최고령 고목나무 무궁화가 존재하고 있어서 유명할 뿐이다. 그 뜻 깊은 문화재 교회건물은 속절없이 사라졌다.

우리나라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조선 말기의 원초적 모습을 띤, 그 유일한 문화재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무참히 사라질 수 있는가?
 
왜 백령도 교회에 무궁화 천연기념물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 자랑스러운 무궁화에서 백령도 교회를 지은 초창기의 애국적 독립정신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무궁화를 철저히 뽑아내며 박해하던, 공포의 왜적 탄압시대를 의연히 견딘 무궁화가 대견하다. 백령도 교회 문화재는 이 시대에 참담하게 사라졌으나, 민족 최고의 무궁화가 남아서 항일전쟁의 단호한 기백을 자랑하고 있다.
 
백령도 교회는 새문안교회의 시원적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그 무궁화나무가 의연하게 초기 교회의 애국의지를 웅변하고 있다.
 
새문안교회도 문화재를 지키려는 단호한 뜻이 있어야, 훗날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기존의 문화재를 허물어 없애기는 너무나 쉽다. 하지만 그 문화재를 허물고 나면 영원히 못 찾는다. 새문안교회를 다시 지으면 무궁화라도 남을 것이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이렇게 교회를 마구 허무는 나쁜 관행이 왜 생겼을까? 그것은 생각하되 일제탄압의 후유증이라고 보인다. 일제 강점시대에 일제에 영합했던 천주교는 좋은 장소에다 좋은 대우를 받았다면, 미국 교회였던 개신교는 의연하게 한국인들을 돕는 독립운동을 하여 일제에 푸대접 탄압을 받은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나쁜 장소에다 허름한 교회에서 출발하게 되니까, 교회를 마구 허물며 다시 짓는 악습이 생긴 것은 아닐까? 교회 건물도 역사가 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있다. 교회 기념물을 아끼는 교회 문화가 정립되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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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다시 한 번, 130여 년 전에 최초로 미국 교회가 전래 되었다면서 도대체 역사 있는 교회 건물이 어디 있나 찾고 또 찾아보자. 현재의 40여 년 된 문화재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교회를 상징하는 그 보물마저 사라지며 다시 재건축 된다면, 문화 역사적 가치는 전혀 없는 한낱 부동산 건물에 불과하게 된다.   

너무나 안타깝고 서글픈 소식이다. 우리사회의 문화실조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안천 (서울교육대학교 한국학교육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