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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산업화 당하다 ①] 개룡녀 강사 A양의 'Paradise Lost'

'답 안 나오는' 강사처우, 순수학문 찬밥… 휴게실도 없는 용역과 종이한장차

임혜현 기자 기자  2013.06.19 15: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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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두 시간짜리 강의가 끝나고 A양은 강의노트과 가방을 챙겨 총총히 계단을 내려간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하는 날은 유난히 조는 학생들이 많다. 파워포인트를 틀어놓으면 학생들은 강의를 '감상'하거나 편히 졸 준비를 한다. 불과 10년 전 자신이 학교 다닐 때에도 대형강의실에서나 눈치껏 졸았지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놈의 '강의평가' 때문에 학생들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기도 어렵다.

요즈음 학생들은 학점에 민감하지만 그렇다고 교수한테 싫은 소리 듣는 것도 못 견딘다.

축제 기간에도 학생회관이나 본관 앞 광장보다 도서관이 더 붐비는 이 시대에 괜히 점수 짜게 매겼다가 다음 학기에 수업 배정을 못 받은 선배도 봤고, 학점 올려달라며 징징거리는 학생들에게 시달려도 봐서 웬만하면 조용히 넘어가자는 '보살 같은' 마음을 얻게 됐다. 아니 사실, 자기가 점수 짜게 매겨 방학 기간에 재수강 들어온 학생을 나중에 여름학기 강의 나갔다 거기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건 좀 그렇다.

어쨌든, 이제 기말고사가 목전이고 시험지 다발에 점수를 매겨 입력하면 이제 이번 학기도 끝이다.

그나마 다른 학교로 이동하기 전에 밥을 챙겨먹을 짬이 있는 게 다행이다. 이 대학은 '교직원식당'이 있어 참 다행이다. 사무직원들 사이에 섞이면 혼잡한 '학생식당'에서 시간을 까먹거나 '교수식당' 틈바구니에서 나이든 교수님들(더 정확히 말해서 이 학교의 정규직 교원들) 사이에서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A양이 1층까지 다 내려오자,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참에 붙은 작은 문을 열고 작은 도시락 보따리를 들고 나오는 아주머니 한 분이 보인다. 필경 이 학교의 청소 아주머니들. 작은 휴게실 공간 외엔 쉴 곳이 없고, 궂은 일을 도맡지만 학교 소속은 아닌, 흔히 말하는 용역 직원들일 것이다.

교직원식당에서 이 학교 직원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남도 아닌 것이 하는 마음으로 점심을 먹는 것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지만, 외부 용역 직원들은 교직원식당 출입 자체가 금지돼 있다니 이마저도 감읍해야 할지 모른다. 

생일이 빠른 올해 34살, 시간강사 A씨는 대학가에 남은 '개룡녀(개천에서 난 용)' 마지막 세대다. A양은 학위를 빠르게 딴 편에 속하지만 속칭 '보따리 장사'로 기약없이 돌아야 하는 시간강사 노릇이 이미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수업을 하는 을대학에 이어 어서 밥을 먹고 병대학으로 이동해야 한다. '불타는 금요일'엔 서울 정대학에서 경기도 모 위성도시의 무대학으로 나는 듯 경차를 몰고 이동한다. 여러 대학에서 조금씩 다른, 그렇지만 대체로 비슷한 교양과목 수업을 하는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다. 다만 학교에서 수업을 어떻게 평가를 할지,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관건이다. 학생들은 점점 뜨거워지며 다가오는 기말시험을 이제 준비해야 하지만, A양 같은 강사들 역시 '전강'으로 어딘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늘 이렇게 시험에 시달려야 한다.

그나마, 금년부터 수업시수(강의배정) 3학점(3시간으로 보면 대체로 무방) 이하인 경우는 다음 학기부터 수업을 배정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나선 갑대학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수업 배정권을 갖고 제대로 '갑질'을 하고 있는 갑대학의 사정도 사실 이해가 전혀 안 가는 바는 아니다.
   축제 기간이지만 바삐 스쳐 지나가거나, 도서관으로 향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대학은 이제 더 이상 지성인의 집합소나 진리탐구의 기관이 아니다. 파편화된 취업준비생들이 모인 대학은 이미 산업화된지 오래다. 사진 속 대학들은 특정 기사내용과 직접적 연관 없음. = 임혜현 기자  
축제 기간이지만 바삐 스쳐 지나가거나, 도서관으로 향하는 학생들이 보인다. 대학은 이제 더 이상 지성인의 집합소나 진리탐구의 기관이 아니다. 파편화된 취업준비생들이 모인 대학은 이미 산업화된지 오래다. 사진 속 대학들은 특정 기사내용과 직접적 연관 없음. = 임혜현 기자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일명 시간강사법에 따르면 교원의 지위를 매주 9학점 이상 수업하는 경우로 제한했다. 전국의 시간강사들의 처우를 높여 주려는 법안이지만, 학교들은 법망의 구멍을 발견해 냈다. 지금도 나눠먹기식으로 견디고 있는 강사들 중에 일부에게 몰아주기를 하겠다는 구상이다.

바로 갑대학처럼 수업을 조금 맡은 강사들을 아예 '젖혀버려' 전체적인 규모 관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도 처음 대학원에 진학할 때만 해도 A양은 꿈에 부풀었다. 대학에서 일하던 아버지 덕에 나오던 직원자녀 장학금은 예전 A양 시절만 해도 학부는 물론 대학원까지도 제공됐다.

그 이후에 취업엔 도움이 안 되는 순수학문이나, 그래도 교수 되려고 해외 유학을 갈 필요가 없다는 게 유일한 장점인 지금의 전공에서 학위를 모두 마쳤다. 지금은 이런 코스 자체가 없다. 사실은 장학금 자체가 쪼그라든 게 아니고, A양 아버지 같은 일을 하던 이들을 학교가 모두 용역으로 채운 탓이다. 경비원 딸이 아나운서가 되거나, 청소 아주머니 아들이 장학금을 받는 학교란, 이제 도무지 찾아보기 어려운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됐다.

순수학문 국내파 출신 A양. 각 대학 당국이 취업률에 갈수록 집착하는 상황 속에서 A양의 설 자리는 별로 넓지 않다. 사실 교직원식당에 출입하는 걸 용인받는다 뿐이지 언제 잘릴지 모르는 건 용역 아주머니와 다를 바 없다. '학과 통폐합'만 피하면, 강의평가 '下'등급만 면하면 하면서 버텨 왔는데, 살얼음판의 두께는 나날이 얇아져만 간다.

이럴 때 보면, 자기가 학부생일 때 아이 맡길 데가 마땅찮다고 고민을 한 줄 흘리던 그 시절 여자 강사님들은 "좋은 세월 사신 것"이다. 철없는(돈없는) 35살짜리 남자친구 B씨 때문에 여전히 비혼인 A양은, 사실 학부생 때 "돈 없어서 결혼 못하는"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감우성과 엄정화가 이해가 안 갔다. 지금은? 엄정화가 똑똑하긴 똑똑한 것이다.

주차증을 내밀자 어쩐지 찡그린 표정으로 훑어보는 (것 같은) 관리박스 안의 직원. 사실 그도 "너나 나나" 싶은 외부인일 뿐이다. 천천히 올라가는 바리케이트 밑으로 유유히 차를 몰고 학교 중앙대로를 빠져나온다. 중앙 도서관에서 정문 앞 높게 솟은 웅장한 건물까지 사람들이 빽빽하다. A양이 꽃띠 처녀이던 시대부터 막 선을 보인, 대기업의 기부금으로 올린 빌딩이다.

***기념관 1층의 비싼 카페테리아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을 보며 A양은 "쟤들은 밥값보다 비싼 커피값을 어떻게 조달하는지" 생각해 보지만 그런 궁금증도 잠시, 마침 떨어진진 좌회전 신호에 속도를 내 본다.

(대학이 위기에 직면했다는 소리는 외환위기의 시대부터 있었다. 순수학문이 고사한다거나 취업학원화된다는 한탄도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외환위기 15년 세월만에 이제 대학은 완전히 '산업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공공연히 학문연구기관이기를 포기한다는 소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고, 구성원은 없고 학교의 생존과 발전만 남은 시대. 적자생존 논리가 이질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이 아닌 자연스러운 뉴노멀이 된 2013년의 대학가 상황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