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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의 역사 돋보기] 정동진과 6.25전쟁 기습남침

안천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기자  2013.06.19 14: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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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정동진은 요즈음 사랑을 불태우는 청춘남녀가 즐겨 찾는, 필수적 관광지와 같이 인식되고 있을 정도이다. 동해바다의 아주 한적한 시골 포구에 불과했던 정동진은, 약 15년 사이에 흡사 천지개벽을 하듯 인파가 몰리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경천동지할 일이다. 정동진은 많은 한국인들이 상상도 못하는 놀라운 비밀을 안고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비밀역사와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관광지가 되고 말았다.
 
정동진은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인 6.25전쟁이 발발하는 날의 새벽 3시에 북한 해군 해병대가 기습남침하며 상륙한 충격적인 6.25전쟁 유적지이다. 한국인들은 전혀 모르게 전격적인 남침을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정동진에는 세월이 물 흐르듯 흘렀다.
 
정동진은 38선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남쪽에 있다. 설악산 관광을 가다 보면 동해안에 38선 휴게소가 있는데, 그 이북은 6.25전쟁 전에는 북한이었다. 그리하여 설악산과 고성, 속초, 양양 등은 6.25전쟁 때에 국군이 북진하여 탈환하면서 되찾은 수복지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38선에서 아주 훨씬 남쪽에 있는 정동진에, 6.25개전일 새벽에 인민군이 대거 상륙했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인 놀라운 일이다. 요즘 서울의 땅 밑까지 인민군 땅굴이 와 있다는 섬뜩한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데, 사실상 정동진은 6.25 날의 아침 새벽에 그 정도로 경악할 기습남침 상륙 지점이었다.
 
당시 인민군들은 엄청난 대부대가 거의 뗏목이나 낡은 어선에 가까운 수준의 조잡한 배를 타고서 기습상륙을 했다. 수십 척의 배였는데, 군함다운 배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상태의 인민군 기습남침 특공부대 이니까, 6.25 개전일에 맞추기 위해서는 북쪽에서 적어도 일주일 이전에 출발했을 것이다. 특히 동해안에는 적당한 항만시설이 미비했던 당시를 생각하면 거의 원산항에서 출발했을 것이니까 약 1개월 쯤 전에는 출발을 했다는 것이 된다. 상상도 못했던 충격적인 기습 남침인 것이다.
 
그러니까 6.25전쟁이 미군과 국군이 먼저 침략하며 우발적으로 전면전이 되었다는 북한 측 역선전 주장이 거짓 궤변임을 확고하게 증명하는 최고의 장소가 정동진이다.

북한 공산 측에 의해 장기간에 걸쳐서 만반의 준비가 있었던 전쟁이고, 확실하게 남침계획이 세워진 전쟁임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정동진인데 이북에서는 그간 원색적인 거짓말을 해 왔던 것이다.
 
38선의 다른 지역은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거짓 선전을 한다면 속을 수도 있었다. 6.25 개전일 새벽에 인민군들은 그들 수뇌부만 남침계획을 극비리에 공유하고, 인민군들에게 조차도 남침의 속사정을 속였었다.

예컨대 서부전선에서는 동부전선을 국군이 북침하니 인민군도 남쪽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했고, 반대로 동해안에서는 서부전선이 공격을 당하니까 남쪽으로 공격하자는 등 모든 전선에서 거짓말을 하며 전면적 기습남침을 했었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인민군들에게 까지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개전 명분이 전혀 없는 전면전 남침을 자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동진만은 전혀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동해바다 특수지역이었다.
 
38선 전체에서 동시에 기습남침을 극비리에 숨기며 개전하고 역선전도 할 수 있겠지만, 멀리 남쪽으로 내려와서 기습상륙한 정동진은 그 것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래서 38선 전 지역에서 새벽 4시에 남침이 개시되었지만, 정동진은 새벽 3시가 되고 말았다. 인민군 해군은 너무 멀리에서 왔으니, 1시간의 시차는 오히려 정확한 것과 같다고도 하겠다. 
 
그런데 그토록 중차대한 정동진이 오늘날 전혀 다른 곳이 되고 말았다. 6.25 전쟁이 북한 측에 의해서 면밀하게 사전에 계획된 전쟁이고, 기습적 남침 전쟁임을 정확히 증명해주는 정동진이 상상 밖으로 전혀 다른 의외의 관광지가 된 데는 나의 책임도 크다.
 
벌써 약 25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는데, 당시에 나는 6.25전쟁 개전 장면을 직접 겪은 목격자, 경험자들을 찾아서 현지조사(fieldwork)를 장기간 진행했었다.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하고 경험하여, 직접 6.25 전쟁이 시작되는 상황을 정확히 증언할 사람들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전혀 6.25 전쟁에 대한 정치학 및 정치사적 연구가 부재한 상태에 가까웠던 때였지만, 그 때에는 ‘6.25개전일 연구’를 할 수 있는 때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그 새벽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노인들이, 표집조사가 가능할 정도로 생존해 있어 이론정립을 위한 연구 가능성이 높은 시기였었다.
 
그러니까 나는 오로지 6.25 전쟁이 일어난 ‘그 날 하루의 역사’를 연구한 정치학 및 정치사 논문을 쓰려고, 만사를 제폐하고 현장 자료를 수집하러 다녔었다.
 
회고하건대 당시 38선 현장 연구를 한 사람은 나 하나였다. 당시 나는 인가가 별로 없는 38선 오지 산골 마을들은 물론이고, 판문점 서쪽 지역은 곳곳의 피난민을 샅샅이 찾았었다. 심지어 캄캄한 밤에도 증언자를 찾아 다녔다. 되돌아 생각하건대 나의 무모할 정도의 젊은 열정이 없었다면 수행하기 어려운 연구였는데, 그 후에 아무도 그 연구를 한 사례가 없다.

본인 연구가 유일무이한 현장연구가 되버렸다. 생각하면 흡사 전쟁터를 다시 찾아 전쟁을 하듯 한 연구였다. 약 4년여를 38선 전 지역을 답사하며, 주민은 물론이고 국군과 인민군 생존자를 찾아 표집조사를 했었다. 특히 극소수의 인민군 생존자를 찾는 과정은 정말로 가시밭길이었다.

그 결과를 ‘남침유도설해부’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정동진은 나의 책 결론부에 나온다. 정동진은 너무도 중요한 6.25 전쟁사 현장인데, 내가 현지조사를 할 때에는 지극히 한적하고 깨끗하며 수려한 바닷가였다. 전혀 꾸민 것이 없는 촌색시같이 티 하나도 없이 맑은 무공해 청정 바닷가였다.

공해, 오염 같은 말은 전혀 존재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환상적으로 아름답고 좋은 바닷가 마을인데, 산 중턱 등명낙가사의 스님이 한가로이 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고 인가도 몇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책을 읽은 유명 언론인 한 분이, 매우 감동적인 장소라며 어떤 작가에게 소개를 했다. 그 작품에서 정동진이 감격적인 장소로 소개되며 유명 관광지가 된 것이다. 광화문 근처의 중국 음식점에서 그 언론인 및 작가와 함께 점심식사를 나누면서, 정동진을 작품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로 하겠다고 하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 작품의 내용도 전혀 몰랐었다.
 
그 방송 드라마는 매우 잘 만들어져 감동적이었다.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정동진이 해돋이(일출)가 신비하게 아름다운 곳이며, 임금님께서 계시는 경복궁에서 정확하게 동쪽 바다에 있어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거나, 세계에서 가장 바닷가에 가깝게 붙은 기차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너무나도 깨끗하고 보석같이 아름다운 바다마을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환상적 스토리가 덧붙여지며,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 전국 제1 관광지가 되었다.

힘 있는 작가의, 힘 있는 드라마의  마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생각하면 한국의 동해안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 많다. 정동진보다도 좋은 곳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유독 정동진이 유명해진 까닭은 애초에 내가 연구하며 소개한 6.25전쟁 개전일의 기습남침 역사에서 비롯된다.

새해 벽두의 해돋이 관광에는 흡사 남대문 시장, 종로거리라고 착각할 정도로 인파가 몰려 놀랄 정도이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이 꾸준히 몰려드는 해돋이 관광객들이, 정동진의 숨겨진 비밀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연중 변함없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정동진의 진면목을 다시 볼 것이 요망된다. 6.25 전쟁은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에 버금할 정도로 참혹한 전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건장한 젊은이들은 거의 모두 죽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고 전국토를 초토화시킨 전쟁이 6.25 전쟁이다.

또 다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최악의 비극을 낳은 전쟁범죄이다. 그토록 비극적인 6.25전쟁의 기습남침 상륙이 처음으로 자행된 정동진을 6.25 전쟁의 날이 찾아 올 때마다 확실하게 직시해야 하겠다. 
 
예전에 우리사회에는 6.25 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 발버둥 치며, 피눈물 속에 살아가는 전쟁 과부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심지어 정동진 아랫마을은 남자들은 모두 죽고 여자들만 사는 ‘과부마을’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많이 잊었지만, 우리나라 곳곳에는 과부마을도 적지 않았었다. 왜 정동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과부마을이 되었는가?

나는 과거에 장기간을 만주땅 통화에 있던 독립운동 유적지인 ‘신흥무관학교’ 연구를 위해 연속적 현지답사를 진행했었다. 그 때에 너무나 가슴 아픈 비참한 곳을 방문했었다. 신흥무관학교 옛터에는 놀랍게도 여인 공동묘지가 있었다. 세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충격적인 공동묘지였다.

일본군들이 남자들은 모두 죽여 흔적도 없고, 할 수 없이 여자들만 묘지에 묻힌 참담한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훗날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으면 합장을 하겠다면서, 통곡하고 오열하며 만든 가매장 묘소가 모여 여인 공동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왜놈들은 그렇게 잔악했었고, 우리의 독립전쟁은 그토록 처절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못된 왜놈들 말고, 누가 또 우리나라 곳곳에 과부마을을 만들었는가?

그렇도록 엄청난 전쟁범죄를 저지른 6.25 전쟁 발발의 첫날 그 장소가 바로 정동진이다. 그 참혹한 전쟁이 멈춘 뒤에 한국 땅에는 남루하게 헐벗은 차림으로 빈 깡통을 들고 동냥을 다니는 거지가 수두룩했었다.

곳곳에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널려 있었다. 고아원마다 전쟁고아가 가득 차 있었다. 정동진의 티 없이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나라의 소중함과 자유의 참된 뜻을 음미하려는 생각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함께 여행을 온 남자 친구나 남편 그리고 아빠가 대단히 소중함을 뼈저리게 가슴 속 깊이 되새겨야겠다.

또한 정동진의 보석같이 영롱한 일출을 보며, 오늘날의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느끼며 되새기는 젊은이들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도 생각할 일이다.

정동진에는 앞으로 더욱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야 한다. 지금까지의 관광목적에 덧붙여 ‘안보관광지’라는 새로운 추가목적을 갖고 많이 찾아갈 곳이 정동진이다.
 
힘차게 떠오르는 동해 바다의 해돋이 태양을 보면서 연인, 아내, 아빠의 손을 굳게 잡아보자. 정동진은 젊은 청춘 남녀들이 내일의 희망을 크고 멋지게 설계하면서, 아울러 강력한 안보와 국방 정신을 다짐하는 곳이 되어야 할 곳이다.

세계를 주름 잡는 삼성, 현대, SK, LG, 포스코도 그렇고 반기문, 김용, 김연아, 박지성, 유현진, 싸이, 소녀시대도 대한민국의 뒷받침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고, 동해 저 멀리에서 지금도 망언을 남발하는 아베, 하시모토 같은 원색적 왜구에 대한 경각심도 다잡아야 할 곳이다. 생각하면 6.25 전쟁도 그 원죄는 일본에 귀착된다.

온 나라를 생지옥으로 만들고 짓밟은 후유증으로 국가공백 상태가 되며 6.25 비극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아베, 하시모토는 추호의 반성도 없다.

특히 동해의 휘황찬란한 일출을 보면서 해군 해병대의 중요함도 다시 인식해야 되겠다. 23전 23승의 완전승리 신화를 창출한, 세계 최고의 해군 해병대장 이순신 장군의 길을 따르는 젊은이가 연속 나와야 한다.

충무공의 ‘충군애국 열정’을 찾아 자랑스럽게 해군에 입대하고, 귀신 잡는 해병대원이 되려는 젊은이가 줄을 이어야 하겠다. 정동진은 이 나라 젊은이들이 꼭 찾아야할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최고 교육장이다. 정동진에서 60년 전의 그 날을 생각하며, 육군이 아주 중요하고 해군도 중요하며 그 당시에는 미미했던 공군의 중요함도 새삼 인식해야 옳다.

60년 전의 정동진은 국군의 소중함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증명해준다. 그렇다. 우리땅 어디에 해군 해병대 차원의 ‘국민 안보교육장’이 있는가? 6.25 개전일 새벽마다 해군 해병대가 대거 참여하는 ‘해돋이 안보 결의대회’가 ‘매년’ 개최돼야 하겠다. 강릉시와 함께 다양한 시가행진도 하고, 멀리 바다에는 군함도 나타나고 공군 비행기가 하늘을 나르며, 함께 손을 잡은 육군 관광객도 격려 함성을 질러야 하겠다.

이순신 장군의 기상이 용솟음치며, 대양해군의 나팔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게 만들어야 하겠다. 왜 지금까지 6.25전쟁의 그 날을 그냥 보냈는가?

수 많은 인민군이 정동진으로 상륙한 그 충격적인 6.25전쟁 개전일 새벽에, 순박한 어촌마을 주민들은 처음에는 인민군인 줄도 잘 몰랐다. 국군이 상륙훈련을 한다고 구경을 하며, 심지어 철부지 어린애들은 국군이 왔다며 뛰어 달려가 만세를 불렀을 정도로 그 엄청난 비극의 새벽을 졸지에 별안간 맞았다.
그 기습상륙을 국군도 전혀 몰랐으니까, 정동진에는 단 한 명의 국군도 없었고 전투도 없었다.

당시 인민군은 멀리 산 너머 마을의 주민들까지 모두 데려다가 무기, 탄약 등을 며칠 간 계속 날랐다고 한다. 여자들까지도 일을 시켰다. 아주 후방인지라 전혀 전투도 없었고 인민군은 그 후 다른 곳으로 모두 이동해 버렸다. 물론 마을의 남자들은 강제로 총동원되며 탄약, 무기류를 등에 지고 따라가야 했다. 그렇게 끌려가서 많이 죽었고 집에 돌아 와서는 그 후유증 갈등으로 서로 간에 죽고 죽이며  남자들은 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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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6.25전쟁이 진행된 3년간에 총소리 한 번 제대로 듣지 못한 특이한 바다 마을이 정동진이었다. 너무나 특별하고 특수한 6.25 전쟁 현대사이다.
요즘 한국현대사를 너무 겉보기로만 보는 흐름이 많다. 때로는 순수성을 상실한 왜곡 연구도 적지 않다.

그간 우리들 주변에는 6.25전쟁사의 원색적인 거짓말도 심심치 않게 횡행해 왔다. 이제 배고픔도 면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이 되었는데, 우리사회도 꾸준히 사려 깊고 격조 높은 길을 향해야 하겠다.

아직도 북한 선전물에 휘둘리며 헛된 소리를 하는, 일각의 이상한 사람들도 제 정신을 차려야 하겠다. 학술연구의 A, B, C만 정상적으로 알아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안천(서울교육대학교 한국학교육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