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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컷] 까치 한 마리로 돌아본 여의도의 가치

이정하 기자 기자  2013.05.24 1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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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모 증권가 앞. 한 행인이 새끼 새를 나무 위로 올려 놓고 있다. = 이정하 기자  
여의도 모 증권사 앞 화단. 한 행인이 새끼 새를 나무 위로 올려 놓고 있다. = 이정하 기자
[프라임경제] 늦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서울 여의도 모 증권사 앞이 사람들로 북적이더군요. 참새가 방앗간 지나칠 리 없다고 호기심이 발동해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 가봤습니다. 새끼까치 한 마리가 둥지에서 떨어져 있더군요.

어미 새는 새끼를 찾아 요란스레 울고 있었고 땅에 떨어진 새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잔뜩 움츠려 있었습니다.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행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새끼를 나무 위 둥지로 올려놓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더군요.

'한국의 맨해튼'으로 불리는 여의도 증권가에 이런 훈훈한 광경도 있구나 싶어 괜히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오늘은 80만평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우리나라 '금융 메카'로 불리는 여의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작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의도는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방송국, 증권가가 밀집해 거대한 빌딩숲을 이루고 있지만 과거에는 쓸모없는 없는 모래땅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여의도(汝矣島)'라는 명칭 자체가 '너나 가져'라고 장난삼아 불리던 것에서 왔다는 항간의 '지방전설'스러운 얘긴데요.

어쨌거나 여의도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16년 일제의 간이비행장이 건설된 후부터였습니다. 일제는 여의도를 일본과 만주를 잇는 항공수송지로 활용했고, 1953년에는 국제공항으로까지 발돋움했으나 김포공항이 생겨나면서 공항의 모습은 서서히 사라지게 됐죠.

일제와 미군이 물러가고 온전한 우리 땅이 된 여의도는 한 동안 잠잠하기도 했으나 영등포와 마포를 잇는 마포대교가 놓이면서 신시가지의 발전을 가속화하게 됩니다. 1970년 6차선 마포대교에 이어 1981년에는 4개선 원효대교가 개통되면서 용산구와도 쉬이 왕래할 수 있게 됐고요.
 
1971년 발표된 여의도 종합 개발계획안에 따라 여의도에는 한국 최초로 엘리베이터와 스팀난방 시설을 갖춘 최신식 아파트가 지어졌습니다. 지금도 버스정류장명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시범아파트가 시발점으로 안정적 고층아파트의 시범을 보인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고 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12층이 뭘 그리 높은가 싶은데 말이죠.

이후 여의도를 대표하는 건물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게 됩니다. 1975년에는 국회의사당이 준공됐고 1980년에는 KBS 제2방송국, 1979년에는 증권거래소 건물이 완공됐습니다. 명동에 있는 증권거래소가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증권사도 여의도로 터를 옮겼고요.

현재 여의도의 상근인구는 2만5000명에 불과하지만 유동인구는 24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부자동네를 대표하는 강남(550만원)보다도 여의도(580만원)의 가구별 소득이 더 높다고 하네요.

‘모래 위 기적’ 여의도.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그 가치를 아직 발휘하지 못해서일 뿐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