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 늦봄의 어느 날, 서울 은평구에 사는 A양은 어제 먹다 남은 밥을 죽으로 끓인 뒤 농협 '아름찬 김치'를 곁들여 먹고 집을 나선다.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읽는 A양. 이른 아침엔 아직 새 국내 소식이 많지 않아 외신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AP통신이 전하는 세계 곳곳의 뉴스를 훑다 보니 어느새 신촌이다. 첫 강의를 듣고 학생회관으로 향한 A양은 생활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알뜰샘 매장에서 노트와 볼펜을 사고, 슬기샘에서 보고서 자료로 쓸 책을 산다. 점심을 먹으니 잠이 쏟아진다. 자취방을 좀 더 가까이 얻을 수 있으면 이동시간도 줄어서 덜 피로할 것 같다. 생협에서 수익금으로 지원하는 '생협주거장학생' 제도를 다음 학기엔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덧 어스름이 깔릴 시간대, 동향 친구 B군이 카카오톡을 보내왔다. 방학 때 부산에 문을 연 바보주막에 가 보자고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가게라고 하니, 정치에 무관심한 A양은 구미가 당기지 않지만, B군의 정성을 봐서 한번쯤 가 줄까 생각을 해 본다. 귀갓길에 보니 동네 어귀 시장번영회에서 '**일 토요일, 번영회에서 장어 두 마리에 9900원 행사를 진행합니다. 시장 많이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대형마트에 맞서려는 고육지책이 짠하지만 그래도 일단 싸니까라는 생각에 A양은 토요일 시장에 나가볼까 생각한다.
관련법 정비로 협동조합이 새로운 도약기를 열고 있다. 아직 확실한 역할 모델이 많이 정립되지 않은 만큼 지금의 뜨거운 관심을 바른 방향으로 모으기 위해서는 민·관·학 연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연세대 생활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알뜰샘 매장. = 임혜현 기자 |
협동조합이 진화하고 있다. 과거 '민법상 조합'의 시절에는 조합이란 '뜻 맞는 사람끼리 뭔가를 하는,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무엇'에 불과했다. 농협이나 수협 같은 경우는 특별한 법적 지위를 가진 조합이라 아예 여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우선 조합의 가장 적당한 형태인 동업을 생각해 보자. 동업을 하기로 하는 계약을 민법상 조합계약이라고 하고, 동업체는 조합체가 된다. 재산 또는 노무 형태의 출자도 가능하다. 재산 또는 노무 출자의 경우에는 그 가치를 얼마로 산정할 것인지를 계약에서 정하면 된다. 조합 재산은 조합원들의 '합유'가 된다. 합유는 공동소유의 한 형태로, 공동소유자 각자의 지분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유'와 다르다(합유 재산을 처분하려면 조합원 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역시나 어렵다. 그래서 이런 조합을 사람들에게 좀 더 가깝게 끌어당긴 것이 최근 마련된 협동조합기본법(이하 조합기본법)이다. 지난해 12월에 제정된 조합기본법에서는 '재화 또는 용역의 구매·생산·판매·제공 등을 협동으로 영위함으로써 조합원의 권익을 향상하고 지역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사업조직'으로 협동조합을 규정한다. 참고로, 국제협동조합연맹에서는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체를 통해 공통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자율적인 조직'이라고 한다.
설립요건을 대폭 손질해 쉽게 마음 맞는 이들끼리 일정한 일을 도모하게 하면서, 바야흐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협동조합이 '붐'을 타는 게 멀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러 형태 있지만, 중요한 건 '공동으로, 민주적으로'
협동조합도 소비자협동조합, 생산자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각 형태별 세부 내용과 장점 등은 앞으로 차차 설명할 것이다.
지금 기억해야 할 것은 '보통의 협동조합'과 '사회적협동조합'이 약간 다르다는 정도다.
이제 조합기본법에서는 5인이상 조합원만 구성해 해당 기관에 신고만 하면 누구나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기 때문에, 영리(또는 비영리)를 목적으로 한 협동조합 법인 설립은 어렵지 않다. 다만, 사회적협동조합이란 지역사회 발전과 지역 주민들의 권익이나 복리 증지, 취약계층 일자리 제공 등 공익사업을 하는 비영리 협동조합으로 기획재정부 장관의 설립 인가를 받아야 한다.
각 지방자치단체나 지역 정가에서도 협동조합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발전의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 대전광역시의회 |
협동조합의 기본틀은 기업의 모델 가운데 하나로 대강은 유사하지만, 주식회사와 가장 크게 차이 나는 부분은 운영의 방식이다.
주식회사의 의결권(선거권)은 '1주 1표' 즉 돈을 많이 내 주식을 많이 가진 자에게 힘이 실린다. 협동조합은 출자규모에 관계없이 조합원 모두가 평등하게 1표씩 가지므로 이와 차이가 있다('1인 1표'). 사업을 위한 조직이면서도, 그 목적과 운영의 틀에서 영리보다는 조합원의 실익 증진을 최고로 친다는 점이 바로 협동조합 이해의 알파요 오메가다.
◆두레 전통 덕에 성장 기대감? 자립심이 기본 무기 잊으면 안 돼
일각에서는 협동조합 바람이 불면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에 활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다른 한 켠에서는 협동조합이 발달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풍토가 한 걸음 빨리 이식될 수 있는 창구로 협동조합을 이해한다. 금년 초 임기가 끝난 보수정권인 MB정부에서 중책을 맡았던 한 관료의 발언은 이 두 가지 모두가 정답임을 방증한다.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한 간담회에서 "협동조합은 시장중심 경제와 정부 주도 경제체제의 양 극단이 갖는 한계를 보완해 준다"며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또 박 전 장관은 우리 한국인들은 두레, 품앗이 등 협동과 협력의 DNA가 발달해 있어 세계 어느 나라보다 협동조합이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갖고 있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하지만 두레나 품앗이처럼 서로 돕는다는 온정적인 부분에만 기대서는 협동조합이 잘 뿌리내리기 힘들다.
장종익 한신대 교수는 "단지 '협동조합이니까'라며 정부 지원 등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두레나 품앗이의 무임승차자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는 또 밖에서 지원과 원조를 받는 게 익숙해져서는 협동조합을 만든 초심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러저러한 사회적 역할을 하니까 지원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그저 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창의성과 안정감 필요한 업종도 적합, 관계자들 사랑 얻으면 대기업도 안 부러워
이런 가운데 시장상인이나 학교의 생협 같은 이전에는 대형유통업체 등에 밀리는 것이 기정사실화됐던 협동조합들도 새 물결을 타고 번영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연세대 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슬기샘' 서점 전경. 이 학교의 경우 대형서점 매장 진출이 무산될 정도로 생협과 그 매장에 대한 애착이 높다. = 임혜현 기자 |
연세대의 경우 대형서점의 지점 입점도 무산시킨 학생들의 생협 사랑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2010년 7월 연세대 구내에 진출하려던 교보문고의 계획은 학생들이 내부 의견 절차가 미비했다며 비토하면서 결국 무산됐다. 이는 민주적 운영 이념과 절차상에서도 시사점이 있지만, 관계자들과 밀착해 유대감을 형성한다면, 더 편리한 대형서점 위탁 운영보다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케이스다. 바로 옆 이화여대만 해도 대형서점이 구내에 진출해 있다.
그간 업종 종사자들이 혹사당하다 일찍이 퇴출된다는 의혹에 시달려 온 IT SW 같은 영역도 조합으로 안정적인 쉼터이자 일터를 만들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합식 경영으로 구성원에게 소속감과 주인의식, 고용 안정감을 주면 이렇게 창의성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어 협동조합 운동의 블루오션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SW 개발자 커뮤니티인 'OKJSP'가 협동조합 설립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잘 크면 이익단체 같은 역할도 가능, 정치성 가미 우려는 '잠재적 관찰대상'
이런 조합들이 개별적 역량 강화로 대형화된 자본과 동등한 경쟁의 아주 기본적인 발판을 마련한 경우라면, 이 조합의 연합체들을 통해 더 큰 업종 내부의 고질적 문제나, 일개 개인이나 한 업체 혹은 조합에서 개혁을 시도하기 어려웠던 이슈들에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부산지역 9개 청년협동조합(42개 업체가 소속됨)은 '부산청년협동조합 연합회 창립총회 및 발대식'을 갖고, 조만간 정부에 연합회 허가를 신청한다는 방침이다. 유통망을 독과점하고 있는 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해 자체적인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다.
조금 더 기업화된 케이스, 즉 일정한 크기의 기업들이 모인 경우이긴 하나, 부산조선해양기자재공업협동조합(이하 부산해양기자재공협)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STX 구조조정 사태'에 당국에 업계의 고충을 전달한 것도 주목을 끌었다. 22일 부산해양기자재공협은 결제 지연이 장기 돼 연쇄 부도와 집단 폐업이 우려된다며 미지급 납품 대금의 조속한 변제를 요구하는 내용의 호소문을 업체와 채권단, 정부에 발송했다.
다만, 협동조합 본격화가 이제 막 바람을 타려는 시기인 만큼, 이 점이 정치적 색채 등으로 덧칠되는 경우는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물론 협동조합 자체가 일정한 유대감과 서로를 이해하려는 인식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정치적인 색깔이 다소 들어간다고 해도 이를 모두 막을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 개입 등 다른 사회질서나 제도규정 등에 상충될 부분은 무엇인지, 연구가 시급하다는 지적은 유효해 보인다. 민주당 부산시당이 인본사회연구소 등과 함께 총 4회에 걸쳐 협동조합의 탄생 배경과 역사 등을 알리는 '안녕, 협동조합' 기획강좌를 연다는 점에 지역 정가의 눈길이 쏠리는 점, 박원순 서울시장 집권 후 협동조합 관련 이슈화에 보수층에서 백안시하는 대목 등은 우리나라 협동조합사의 다음 페이지를 순조롭게 넘기기 위해 조만간 빠른 상호간 대결과 토론, 이해 등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