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농협이 제왕적 지배구조 탓에 금융 파트 수장이 항의성 사표를 던지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이렇게 중앙회와 금융·경제 부문의 관계 설정 모델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농협은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이런 운영 체계 대신 해외 선진국들의 협동조합 금융기관의 기틀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세계경제의 침체와 금융업 저성장 기조의 위기 속에서 신생 금융그룹인 농협금융지주와 그 산하기구들이 살아남을 방법을 간략히 살펴본다.
신동규 전 농협금융지주 회장이 최근 전격 사의를 표명하면서 농협의 구조적인 한계를 지적했다. 신 전 회장은 최원병 농협중앙회장에게 집중된 권한에 한계를 느낀 것으로 분석된다.
원래 농협중앙회는 농협법에 의해 움직이고, 금융 파트(농협금융지주)는 금융지주회사법에 따르면 되고 다른 금융 각 영역 세부 사정에 따라 은행법 등을 참조하면 된다고 세간에서는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농협법은 그야말로 특별법으로, 그간 중앙회가 금융지주의 분리없이 사실상 모든 것을 관할해 온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앙회 독주 시절 그대로 답습한 틀…금융지주 '뱅커 기질' 압살
금융지주회장 사직소동으로, 농협은행 등 금융파트가 중앙회의 압제에 시달려 뱅커 기질을 펴보지도 못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농협은행 |
이런 구조 때문일까? 신충식 농협은행장도 지주회장을 겸임하다가 3개월 만에 물러났던 바 있다. 실속 없는 허울을 쓰고 있을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분석이다.
이어 바통을 넘겨받은 신 전 회장 역시 1년을 못 채우고 이번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신 전 회장은 관료 출신으로 4대 금융지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적임자로 꼽혔고, 역시 갖은 시도를 했지만 중앙회의 간섭을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 차기 수장을 누가 맡으려 하겠느냐는 우려도 쏟아진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타금융지주 회장과의 연봉 차이는 이런 고질병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법 고쳐야 비상운전 가능? 법 바꿀 의지는 누구에게…
이런 사정을 답답하게 여기는 금융권 관계자들은 농협법을 개정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정을 잘 모르는 의견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미 농협은 엉성한 금융과 산업 분리 과정 추진으로 인해 호된 시련을 겪었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관에게 추궁을 당하기 전까지는 공정거래법 위배가 되는 쪽으로 개편안을 추진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는 얘기도 나온다.
'50년만의 조직 개편'이라는 요란한 팡파레를 울리며 일을 추진하고 나섰지만, 지난해 여름 여러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지적사항에 올랐다. 은행법 규정에 따르면 자기 건물의 반 이상을 임대하지 못하게 돼 있는데 금융과 산업을 분리하는 와중에 이를 챙기지 못해 구설에 올랐다.
또한 대기업집단에 지정되는 점을 못 챙겨 이로 인해 농협은행과 농협증권이 보유하던 사모펀드 지분 중 30% 초과분을 손실을 감수하고 모두 팔아야 되는 위기(자본시장통합법 위배)도 맞았다.
◆중앙회, 내부 연구성과 외면… '제갈공명 와도 안 될 조직' 비판은 모면
이에 따라 지난해 연말, 규정 신설을 통해 공정거래법 제8조의2 제2항4호 예외 규정을 신설하는 방향으로 개정 삽입이 됐고, 또 공정거래법 제11조의2도 마련해 끼워넣는 진통을 겪었다. 문제는 당국에서 이 같은 법률 개정을 할 때 지배의 구조틀을 변경하는 데에는 인색했다는 것이다.
급한 사안부터 처리하겠다는 의사일 수도 있으나, 현재 중앙회의 지도 체제를 인정해 주겠다는 의사로도 읽을 수 있다. 몇 개의 간단한 문제만 건드리는 '(거의) 원포인트 개정'을 한 데다 전산망 문제 등까지 사실상 금융쪽에서 뒤집어 쓰고 비판을 당하다 보니 신 전 회장이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인사·조직·경영전략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농협금융지주의 자율적 경영이 어려운 사정이고, 또 개선을 정치권이나 당국 등에 기대할 희망도 없는 사정이고 보니 "현 상황에선 제갈공명이 와도 안된다"는 말까지 나오는 게 무리가 아닐지 모른다.
다만 규정들을 종합하면, 현재와 같은 상황을 중앙회 쪽에서 만드는 것은 지나치게 적극적인 권한의 행사로 볼 여지가 있다. 농협경제지주나 농협금융지주를 포함한 자회사들은 중앙회의 감독 대상인 것은 맞다.
하지만 지도·감독에 따른 판단으로 자회사에 경영개선 등 필요한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재량 조항인 만큼 지금과 같이 인사부터 전략 등 모든 부문에 입김을 가한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는 선에서 타협을 볼 수도 있는 것으로 진단된다.
경제와 금융을 분리하는 마당에, 과거부터 진행돼 온 '신용사업(금융)으로 돈 벌어 경제사업(농민지원)에 사용'이라는 대전제에만 충실하고, 지나친 감시와 간섭의 힘은 내려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농협은 신용 부문에서 돈을 벌어 경제 부문 재원으로 써 왔다. 이 때문에 농협이 왜 금융업에 열을 올리냐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지점을 늘리면서 영업 기반을 닦아 온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살아온 세월에서 이제 대수술을 받고 신용과 경제가 분리되면 돈줄이 막혀 경제 부문이 더 악화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당연히 분리에 임박해 제기됐다.
농협은 물론 정부에서도 가장 신경 쓰는 대목이었지만 이렇게 신용과 경제 간 파이프라인 형성을 하는 문제에만 치중하다 보니 정작, 돈을 버는 쪽이 비명을 지를 만한 가렴주구 사정이 빚어진 것이다.
농협이 금융 파트에서 경제 부문 지원의 법적 근거 마련을 하는 등의 조치는 이미 어쨌든 넘어선 것으로 보자면, 이제 실질적인 자금 이전 전략을 짜 시행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파이프라인이 막혔다.
농협이나 당국에서는 신용(금융)에서 발생한 수익의 일부를 배당금과 브랜드 사용료 명목으로 중앙회로 이전하고, 이를 경제 파트에서 사용하도록 전략을 짰다. 분리가 돼도 출자 형태로 지원이 가능하다는 분석은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간섭만 많은 사정에서는 돈을 벌 수도 없고, 이런 중앙회에 막대한 브랜드 사용료를 뜯길 이유가 사실상 없다. "브랜드 사용료, 참 희한한 것"이라는 고위층 비판이 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번 문제의 배경과 원인이 모두 꿰어져 나온다.
◆내부 보고서는 이미 프랑스 농협·네덜란드 라보뱅크 장점 인지
이런 사정에서 중앙회라고 인식을 못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적어도 농협 내부의 연구자들은 농협이 경제와 금융을 분리해 세계적 협동조합형 금융기관 육성 등 앞으로 나가는 이유를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1998년 10월, 농협 내부에서는 농협조사월보라는 자료를 통해 네덜란드 라보은행과 프랑스 농협중앙은행의 경영시스템을 분석했다.
이 자료에서는 프랑스 농협이 회장을 중심축으로 관리위원회 명목의 조합대표 측과, 최고경영책임자를 중심으로 한 업무집행 측으로 건전한 긴장 관계를 조성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농협경제연구소에서 나온 보고서는 이미 프랑스 농협중앙은행 등의 업무집행권 독립성에 주목한 바 있다. 사진은 '농협조사월보' 1998년 10월호에 실린 논문 삽입표. ⓒ 농협경제연구소 |
프랑스 농협의 경우 다른 협동조합 금융기관과 달리, 중앙조직과 회원 조합은행이 서로 불가분하게(논문에서는 Inextricable이라는 단어를 사용) 결속돼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그러면서, 이런 특징은 업무의 경영적 측면과 경영보호제도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라보은행은 농업금융 서비스에 특화한 점을 눈여겨봤다. 네덜란드 내부는 물론 세계 농식품업계에까지 라보의 입지를 인정받고 있는 점은 미국 농협들이 상업은행적인 일반 대출에 활발한 것과 달리 전문성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서는 말한다.
그런데, 지금의 농협은행 등 농협금융지주 산하 가족들이 높은 브랜드 사용료 비율에 시달리고, 또 회사를 말하면 바로 떠오를 대표 브랜드를 만들라는 등 영업 경쟁에도 내몰리다 보면, 이는 결국 전문성도 경영의 독립성 보장도 없이 모호한 틀로 질주를 시작하는 것 밖에 안 된다.
단지 전체 조직을 위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전락하고 있다는 기우까지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중앙회가 권한의 자제를 다시금 검토해야 할 때가 아니냐는 우려는 이런 이유로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