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전략적 봉쇄소송(SLAPP)은 기본적으로 '돈의 힘'이다.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 조직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조직을 압박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거대한 금액이 청구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버티는 시간의 장단 차이가 있을 뿐 대개의 경우 무너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같은 봉쇄를 뚫고 살아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외환은행 노조의 사례다.
외환은행 노조는 하나금융그룹이 과거의 대주주 론스타에게서 외환은행 지분을 사들이는 것을 추진하자 격렬히 반발했다. 가처분 신청으로 입을 막는 등 하나금융의 압박이 거셌는데 결국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조건으로 양보를 얻어낸 반쪽의 성공을 거뒀다.
◆'노욕' 의견광고로 하나금융과 충돌, 이후 하나고 출연으로도 악연
심지어 하나고 출연금 과다 논란 등에서도 김승유 전 하나금융그룹 회장이 소송 압박 으름장을 놓았지만 결국 이 문제에서는 승기를 잡기도 했다.
이 두 케이스를 살펴보면, 외환은행 노조가 살아남은 이유를 통해 봉쇄소송에서 버텨내는 힘은 어디서 오는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늦가을, 하나금융그룹은 론스타로부터 외환은행 지분을 인수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런 상황은 과거 국책은행에서 시작, 전통있는 금융기관이라는 자존심이 강한 외환은행 직원들의 자존심에 크게 금이 가는 것이었다. 중복점포 폐쇄로 인한 감원 우려 등도 문제가 됐고,실제로 역사 차이뿐만 아니라 하나은행 등 하나금융그룹 산하 조직 근무 여건이나 급여 등 조건이 타은행계에 비해 좋지 않다는 점도 불안감을 더했다.
이에 외환은행 노조는 금융 당국 앞에서 반대 집회를 여는 등 저항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광고를 통한 여론몰이에 나섰다. 외환은행 노조는 동아일보·메트로·포커스 등에 의견광고를 실었다.
외환은행 노조의 의견광고는 하나금융그룹의 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당하는 등 파문을 일으켰다. ⓒ 외환은행 노조 |
이에 하나쪽에서는 외환은행 노조를 상대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광고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이후 이 가처분 외에도 노조 간부가 블로그글을 통해 관련 문구를 계속 사용하자, 추가 소송 가능성이 불거지는 등 봉쇄소송으로 볼 수 있는 일련의 활동이 이뤄졌다.
하나쪽과 외환은행 노조가 불편해진 경우는 인수 문제가 매듭지어진 다음에도 또 있었다. 하나쪽에서 출연해 세운 자립형사립고인 하나고에 외환은행이 거액을 출연하기로 한 점에 외환은행 노조가 반발했다. 이 사안에서는 하나고측에서 명예훼손이라며 소송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일촉즉발의 사정으로 치닫기도 했지만, 결국 출연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금융위원회에서 내놓으면서 '노조 파워'를 다시금 입증하고 끝났다.
◆비결 I: 정확한 자료' 활용해 맞서라
먼저 빚어진 광고 신경전의 경우를 보면, 최대한 정확한 자료를 통해 적에게 공격을 걸어야 봉쇄 시도에서 유리한 국면을 점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하나측의 광고 금지 가처분 주장 뼈대는 외환은행 노조가 전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위 주장들을 하고 있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런 광고가 지속될 경우 기업 이미지 및 영업활동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외환은행 노조는 하나쪽을 비판한 의견광고는 이미 언론이나 증권거래소 공시를 통해 적시된 사실이거나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맞섰다. 하나금융그룹의 가처분 신청은 외환은행 인수에 대한 건전한 비판세력 확대를 사전 차단하고자 하는 이기적 목적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외환은행 노조의 이 같은 우려는 상당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견광고 논란 무렵 당시 유력 외신들도 하나측의 자금 조달 능력에 대해 (쌓아놓은 자금이 충분치 않아) 대출을 상당 부분 안는 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하나측이 외환은행 인수 자금의 절반 가까이를 채권 발행과 대출을 통해 조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애널리스트 설문 조사 결과를 인용해 보도했다. 이 무렵, 로이터통신 역시 하나측이 칼라일그룹과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 등 외국계 사모펀드들과 외환은행 인수 자금 마련을 위한 예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가처분은 왜 인용됐을까? 이는 당시 하나금융그룹에서 문제를 특히 제기한 부분인 '김승유 회장(註:광고 당시, 즉 외환은행 인수 추진 과정에서는 '현직'이었음)의 연임을 위한 노욕', '먹튀 하수인' 운운하는 표현들 때문이었다는 분석이다. 물론 김 전 회장의 이 같은 대업 추진에 대해서 전망이나 분석을 통한 비판도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위의 표현은 그런 측면보다는 감정적 비난의 측면이 더 컸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런 점에서 가처분이 결국 받아들여진 셈이다. 팩트의 힘을 감정적 언사가 가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탄탄한 사실을 토대로 공격을 한 경우 역풍 크기가 상당히 줄어든다는 부분일 것이다. 위의 경우도 막바로 명예훼손의 민·형사상 본게임 대신 '가처분을 통한 낮은 수준의 봉쇄' 방안만 사용됐는데, 이는 본격적인 소송으로까지 갈 정도로 엮기에는 하나측으로서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반대로 말하면 외환은행 노조의 의견광고 구성이 문제가 적었다는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비결 II: 당국의 마음을 뒤흔들 공격법을 찾으려면? 공부해라
다음 번 봉쇄 (우려) 상황은 하나고 때문이었다. 외환은행에서 하나고에 자금을 출연하기로 했는데 외환은행 노조에서는 이런 이사회 판단이 문제가 있다고 비판을 제기한 것이다(작년 10월 이후를 뜨겁게 달군 은행법 논란).
외환은행 노조는 특히 국내외 경기침체 등 은행 건전성 제고 노력이 절실한 상황에 오히려 257억원이라는 거금을 외부에 출연하는 게 온당치 않다고 지적하고, 자사고인 하나고를 귀족학교로 규정해 왜 이런 곳을 지원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외환은행 노조의 이런 지적은 결국 하나금융그룹 수장에서 물러난 후 하나고 이사장으로 가 있는 김 전 회장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배후론에 불을 붙인 셈이다.
봉쇄소송은 결국 돈의 힘이 좌우한다. ⓒ 프라임경제 |
하지만 김 전 회장의 으름장은 외환은행 노조의 행보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점이 작용했다. 윗단락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팩트의 힘이 우선 컸다. 외환은행 노조는 하나고 출연 논란과 관련, 포털사이트 네이버 검색 내용을 활용했다. '귀족고등학교'를 치면 연관검색어로 '하나고'가 뜬다는 것(이런 내용의 이미지를 하나고 출연 문제 비판 광고에 함께 실었음).
그러나 이 케이스에서 주효한 것은 '은행법 논란으로 국면을 세팅한 어젠다 개발 능력'이었다.
지난해 10월18일 외환은행 노조는 진정서를 당국에 제출했다. 진정서는 당국의 감독권 행사를 요청하는 것으로, 은행법 제35조2항 위반 가능성을 언급했다. 즉 은행이 대주주 등에게 자산을 무상으로 양도하거나 현저하게 불리한 조건으로 신용 공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규정을 벗어난 출연금 지급 계획을 통과시킨 경우인데 왜 감독권을 행사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한 셈이다.
하나금융그룹의 특수관계인인 김 전 회장이 이끄는 하나고가 같은 그룹에 속하는 외환은행에서 거액의 출연을 받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개발한한 데 대해 당시 금융권은 물론 사회 각계가 상당히 관심을 기울였다. 이전에 은행계에서 행해진 많은 사회공헌 행보 중에도 이런 은행법 위반 가능성 활동이 적잖았는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신경쓰지 않고 진행됐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 맹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논리 구성을 한 것이고, 결국 당국이 사실상 외환은행 노조의 '의도'대로 문제 소지 판단을 내렸으며 시행령 개정 등 추후에도 외환은행 노조발 여진이 이어졌다.
◆비결 III: 우호적 여론 이끌어 내려면 조직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외환은행 노조의 대(對)하나금융그룹 투지는 길거리 투쟁에서 발휘된 바 있다. 하나금융그룹에서 임명한 윤용로 행장이 정상출근을 하기 전까지 길거리 투쟁을 통한 공세가 여러 번 등장했는데, 이런 활동은 문제를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동정적 여론을 조성하는 데 큰 힘이 됐다. 그런데 이런 여론몰이를 하는 데 성공한 외환은행 노조의 투지가 바로 위에서 살펴본 팩트를 캐내고 관련 규정 등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데 기본 토양이 된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외환은행 노조는 팩트주의, 금융당국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깊이 있는 연구 능력과 단결력 등 봉쇄소송에 버틸 능력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조직으로 꼽힌다. 사진은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 추진 반대 촛불집회 당시 장면. ⓒ 외환은행 노조 |
외환은행 노조는 이전에도 결속력을 탄탄히 다져온 바 있다. 은행계가 다들 힘들어하던 IMF 구제금융 시기, 일부는 합병을 해 새 은행을 탄생시키고(우리은행 탄생 과정), 일부는 다른 데 흡수되는 등 힘든 사정이 많았지만 외환은행은 가장 큰 비극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외국계에 넘어가는, 그나마 유력 해외은행도 아닌 펀드에 인수당해 매번 고액 배당 추진으로 진이 빠지는 사정에 시달리면서 외환은행 노조는 강경한 투쟁 실전을 치러왔고, 그때 다져진 결속력이 길거리 투쟁이라는 사상 초유의 난국에서도 잘 발휘된 셈이다.
◆비결 IV: 기본적인 자금 능력 있어야
외환은행 노조원들의 단결된 모습은 시민들의 하나금융 거래 중지 운동을 이끌어냈다. 일명 하나은행 뱅크런 운동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하나금융 통장을 폐쇄하거나 카드를 자르고 인증샷을 올리는 유행도 있었다. ⓒ 한 시민의 SNS 인증샷 장면
마지막 부분은 SLAPP에 맞서려면, 아주 기본적인 정도의 자금 조달 능력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호사 선임이나 소송에 시달리는 조직원들을 보호하려면 장기적으로 생활 자금 지원 등까지도 확보해야 한다. 외환은행 노조가 강경하게 투쟁을 매번 할 수 있었던 것도 구성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마련한 자금이 뒷받침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넓게 보면, SLAPP를 맞게 된 원인인 비판적 의견광고를 낸 것도 다 광고지면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환은행 노조의 능력은 노동투쟁사를 정리하는 영역에서는 물론 이렇게 SLAPP 관련 논의에서 참조할 만 하다는 점에서 언젠가 깊이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