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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의 역사 돋보기] 5.16 혁명 청문회 희극

안천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기자  2013.05.15 11:3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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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박근혜 정부가 출범 초 각 부처의 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진행되며 코미디가 연출 됐다. 당시 촌극의 핵심은 '5.16'의 정의였다. 곧 다가오는 5.16을 맞아서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5.16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특히 지난 번 청문회에서 가관인 것은, 5.16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하는 사례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다만 정홍원 국무총리 후보자만,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5.16정변으로 되어 있다고 답해 순탄하게 통과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코미디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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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애초에 부르던 혁명이 정답이라고 본다. 과거에 5.16을 혁명으로 부른 것은 장기간 학계에서 정리한 결과이다.

물론 5.16혁명은 나름대로의 차별적 특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포괄적 의미로서의 혁명이 맞다.
 
그러면 현재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있는 정변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하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틀린 것이다. 정변은 쿠데타를 억지로 번역한 것인데, 정변이란 아직 정치학계에서 확증된 학술용어가 아니다.

쿠데타를 번역할 용어를 무엇으로 할 지 학계에서 합의한 적은 없다. 4.19를 의거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학술용어로 정착되지 않은 것이다. 우격다짐으로 갖다 붙인 것에 가깝고, 사실상 수사적 표현에 해당한다. 차라리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낫다.
 
그간 학생들의 교과서에는 현대사를 사실 나열의 수준에서 간단하게 정리해 놓았었다. 따라서 초중고교 학생들에게는 1945년 이전까지의 교육은 나름대로 상세히 학문적 유권해석을 해주지만, 1945년 이후 현대사는 사실 관계만 간략하게 적시해서 가르쳤다. 따라서 최종 판단은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자라며 추후에 판단하게 했었다.
 
그 까닭은 현대사를 아직 최종적으로 학계에서 연구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아직 미완성된 현대사를 그대로 가르치면 거짓 교육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6.25전쟁은 소련 기밀문서 등을 포함하여 중요 문서가 많이 공개되어, 거의 확정적으로 북한의 기습 남침임이 확실히 정리되었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오도된 해석을 늘어놓는다. 따라서 6.25전쟁은 확실하게 분명한 사실만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 거짓말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요즘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도 일각에서 일방적 시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것으로 학문적 종결을 지으려는 성급한 흐름이 있는데, 그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심지어 영화 까지 만들어 특정 방향으로 무작정 몰아가고 있는데, 4.3사건은 아직 최종 결론을 맺기에는 시기상조이다. 너무나 일각에서 일방적인 결론을 강요하는데, 그 이유를 담백하게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결코 부화뇌동하며 흥분할 일이 아니다.

학문은 객관적 결론이 나올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과거에 6.25 전쟁을 북한 선전에 동조하며, 친북 선전 학술로 진행했던 일각의 거짓말을 반복할 수는 없다. 4.3 사건도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최종 결론은 확실히 유보되어야 한다.

학문은 정략적 선전 선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컨대 왜 4.19는 거꾸로 일각의 의도적 주장이 거의 없는가도 깊게 음미되어야 한다. 4.19는 그간 실종된 혁명이었다.

하지만 사실상의 실종된 혁명이 되고 말았는가 하는 이유를, 우리는 그간 거의 생각한 바가 없다.
 
마찬가지로 5.16도 아직 최종적인 학계의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모든 정치현상이 그렇듯이, 5.16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포괄적 의미의 혁명으로 부르면 틀리지 않는다.

예컨대 요즘 언론에 나오는 재스민 혁명, 오렌지 혁명 등은 포괄적 의미이지 고전적 혁명론과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니다.
 
세계사에서 살펴 볼 때에 완전한 의미의 혁명은 별로 없다. 프랑스 대혁명과 러시아 대혁명 정도가 가장 혁명론에 가깝게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여타 혁명들은 포괄적 정의와 미시적 정의에 따라 개별적 차이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포괄적으로는 5.16도 4.19도 혁명에 모두 포함된다. 완전한 사람이 없고 사람은 각자 천차만별인데도 불구하고, 모두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없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교과서에 있는 정변은 언제부터 나온 것인가? 그것은 사실상 노무현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자의적 해석을 한 것을 교과서에 넣은 것이니까, 사회과 교과교육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잘못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당시 폭넓게 학계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노무현 정부에서는 아예 ‘현대사 교과서’까지 작심하고 만들어서 가르쳤는데, 당시 교과교육 전문가들과 그 중대한 문제를 폭넓게 논의한 절차와 과정이 없었다.
 
그것은 정말 부당한 일을 일방적으로 한 것이다. 현대사 교과서는 출현 자체가 의도적이고 정략적임이 분명하다. 아직 학계에서 최종적 검증도 되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자의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

노무현 정부에서는 일각의 견해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며, 현대사 교육을 일방적으로 실시했다. 그것은 순수한 의도가 아닌 다른 의도가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정변이란 용어조차도 학계에서 통설로 인정한 적이 별로 없다. 쿠데타를 우리말로 애써 바꾼다면 차라리 반정(反正)이 더 맞다. 한국사에서 5.16과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중종반정, 인조반정이 그런대로 가깝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나오는 반정은 동양사상가 맹자의 정치사상 등을 배경으로, 조상들이 심사숙고하여 만든 용어니까 그것이 더 합당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용어로 반정이 가장 흡사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쓴 적은 결코 없다. 그러면서 5.16을 자신들의 뜻에 맞게 만들려는 일각의 흐름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5.16을 무조건 쿠데타로 몰아가려니까, 정변이라는 수사적 신조어를 쓴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정치적 혁명을 폭넓게 보면 모두가 정변이다. 그럼에도 유독 5.16만 정변으로 모는 것은, 선행적 의도가 개재된 것이 확실하다.
 
장관 청문회에서 계속된 질문이 던져졌던 5.16은 정홍원 총리의 사례로 볼 때에, 틀린 답을 갖고 틀린 답변을 유도하려는 저의를 가진 의도된 것이라고 보인다. 그런 질문 의도를 똑바로 알기에, 답변자들은 제대로 답변들을 못하거나 얼버무렸던 것이다.

어떻든 각 부문 국정의 최고 책임자를 가리는 장관 청문회가 코미디 수준으로 진행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청문회에서 공직 후보자의 국가관을 검증하려면 5.16을 잇달아 묻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주 부족하다. 어찌 보면 떳떳하지 못하고 비열한 측면도 있다. 국가관을 정면으로 질문하는, 당당한 정공법 청문회가 아쉽다.

청문회에서 있었던 5.16의 질문 답변은, 사실상 꼼수 질문과 꼼수 답변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아직 학계에서 최종적 정리가 되지 않아서 후세의 사가(史家)에게 최후 판결을 맡길 것을, 특별한 저의를 갖고 자의적으로 청문회에서 오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나온 정변이 정답이라면 정치학계는 왜 존재를 하는가? 그리고 사회과교육 학계는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닌가? 

모든 학술 연구를 국회에서 다 알아서 결의하고, 학생들 교육도 국회의원들이 결정해 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5.16을 묻는 청문회 사례는, 학계의 존재 자체를 본질적으로 무시해서 나온 것이다.
 
그런 논쟁은 학술대회에 맡겨서 학계에서 학자들이 해결할 일이다. 학자들 끼리 온갖 의견을 다 내놓으며 긴 시간을 보낼 학문적 주제를, 정치인들이 특정한 시각으로 오용하거나 남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정치적 흐름은, 사실상 민주적 청문회 절차로 위장하여 호가호위하는 새로운 신판 독재일 뿐이고 또 하나의 정치적 위선이다.
 정상적인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청문회 자체도 민주적이라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존재하는 청문회 자체가, 민주주의를 남용하는 새로운 독재로 전락되면 청문회의 본질적인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선전이 아닌, 실천이라야 한다. 하지만 사실상 독재자들이 민주주의 선전은 더 많이 해 온 것이 지나온 세월이다.
 
죽은 민주주의를 위한 죽은 제도는, 허장성세 민주주의로 시간을 허송하는 죽은 시간일 뿐이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정치인은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 방안에 대해 골몰해야 한다. 그리고 5.16을 정상적으로 연구하도록 학계를 지원할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청문회다운 청문회가 아쉽다. 털어서 먼지나지 않을 사람이 없건만, 낮은 차원의 신상 털기 청문회가 진행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민주주의의 본질을 천착하는 격조 높은 민주적 청문회는 언제쯤 가능할까?

안천 (서울교육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