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현·조국희 기자 기자 2013.05.08 17:16:29
[프라임경제]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지적재산권 분야 감시대상국 명단에서 우리나라가 5년 연속으로 제외됐다. USTR은 1일(현지시각) 주요 교역국의 지적재산권 보호·집행 현황에 대한 검토 내용을 담은 '2013년도 스페셜 301조 보고서'에서 한국을 지재권 감시대상국에서 제외했다. 이는 지난 4월 USTR이 펴낸 '2013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NTE)'의 평가와는 상반되는 것이자 긍정적인 평가여서 주목된다.
하지만 이 같은 미 무역 당국의 5월 평가는 정말 떳떳한 것일까? 오히려 차세대 한국을 책임질 지성인들이 모인 대학 근처에서는 이 5월 평가보다 4월 보고서가 더 정확한 것 같다. 당시 보고서는 "한국에는 여전히 새로운 방식의 온라인 해적행위와 공공부문의 소프트웨어 무단사용, 대학 내 서적 불법복사 등의 문제가 남아있다"고 평가했다.
◆대학가 '복사집', 이미 '낭만' 넘어 하나의 사회현안으로
대학가에는 과거부터 복사를 주업으로 하는 가게들이 존재해 왔다. 이는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이 구하기 어려운 사정의 자료를 얻는 통로였으며 학생운동 출신 선배들의 호구지책을 돕는 창구이기도 했다. 과거 긴급조치와 국가보안법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 금서가 많았던 만큼 학생운동 출신들은 복사집과 영인본 출판(원본을 사진이나 기타 과학적 방법으로 복제한 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한국의 최고지성인들은 불법복제를 여전히 당연시하는 토대에서 길러진다? 대학생들이 복제 유혹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소송 등도 진행 중이지만 해결은 요원하다. 대학생들은 반드시 구입할 필요 없는 서책의 구매를 강제하는 풍조를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문제를 많이 해소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 임혜현 기자 |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군사정권 시절에나 통하던 '낭만'이다. 과거에 느슨한 데다 국제적 기준에 뒤떨어져 있던 한국의 저작권법 체계는 외국 서적의 무단번역 출판(해적판) 등을 규제하는 등 일부 영역부터 서서히 고삐를 죄기 시작해 이제는 복사를 뭉텅이로 하는 '제본' 행위에까지 칼날을 겨누고 있다.
USTR 4월 보고서에서 언급된 대학가 복사 문제가 바로 이 영역이다.
우리 당국이나 출판업계라고 해서 이 같은 문제를 마냥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한국복사전송권협회(이하 전송권협회)는 서울대학교·성균관대학교·한양대학교·경북대학교·명지전문대학·서울디지털대학교 등 6개 대학에 대해 저작물 보상금 청구 소송을 각 지역 관할에 따라 여러 법원에 제기했다.
전송권협회는 저작물에 대한 복제 보상금을 받아 저작권자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단체다. 전송권협회가 이들 6개 대학을 소송 상대로 고른 것은 다른 대학들에 비해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판단된 곳들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소송은 그러나 현재 진행에 브레이크가 걸린 상황이다. 작년 6월 무렵에도 이 같은 불법복제와 저작권 침해, 그 예방과 보상 문제에 관련해 논의가 있었으나, 대학 등과 출판계의 입장차가 컸다. 결국 소송이 진행됐고 다시 이 문제가 또다른 난제로 흐르는 상황이 됐다.
2012년 6월12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등 5개 단체로 구성된 '수업목적저작물보상금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국의 각 대학에 "한국복사전송권협회와의 보상금지급계약 체결을 지양하라"는 공문을 발송한 바 있다. 이들은 "전국 5만7000명의 교수가 '대학의 수업목적 저작물에 대한 무료사용 동의요청서'를 작성했으므로, 저작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출판 관련 단체들이 발끈했다. 그달 28일에 대한출판문화협회 등 5개 출판단체가 "출판사 동의 없는 저작권 무료이용동의서는 원천 무효"라고 반대 의견을 개진하고 나섰다. 이들 5개 단체들은 "문화부가 최종 절충안을 마련해 고시한 내용에 대해 비대위가 이제 와서 교수들에게서 받은 무료사용 동의요청서 내용을 빌미로 저작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저작권 침해 대표로 몰린 대학들, 행정소송 맞불 지르며 강경 대응
상황은 결국 전면소송전으로 자웅을 겨루는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그런데, 이 보상금 청구 소송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8일 전송권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 6개 대학들이 이 보상금 청구 소송에 항의, 문화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황이다. 이 같은 '맞소송' 상황의 이론적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
위에서 말했듯 저작권을 침해하는 불법복제가 창궐하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 저작물의 복제에 대해 사용료를 징수, 이를 분배하는 게 전송권협회의 존재 의의이고 이 같은 현행 제도 규정에 따르면 대학은 저작권법률 시스템에서 제외해 달라는 여러 요구사항은 설 땅이 없다. 하지만 이 같은 규제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 이를 다투게 되면 관련 소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전송권협회 관계자는 "현재 문화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라, 이쪽 소송도 경과를 봐 가며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소개했다. 이들 대학은 힘을 합쳐 이 문제에 대항하고 있다는 게 관계자 전언이다.
결국 현재 같은 사정에서는 문제의 해결은 당분간 요원해 보인다.
◆대학생들, "쓰지도 않을 책 사라니까 복제하지!" 분통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대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프라임경제에서는 몇 개 대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재 등을 불법으로 복제하는 사정에 대해 문의하고, 개선 방향 등 의견을 수집했다.
L씨(한국외국어대학교 자연과학대학)는 "비싼 교재값과 등록금이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한편 "해외서적은 구하기 힘든 점이 있다"고 부연했다. 아울러 "고학번들이 안 보는 책을 기부하기 운동 같은 걸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 입에서는 시사점이 제법 있는 의견이 나왔다. 이 학교 L씨는 "중·고등학교 때처럼 (참고자료를) 나눠주는 것도 아니고 따로 구매하기도 귀찮아 제본을 한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이미 저작물을 복사해 돌리는 환경에 익숙해지면 더 느슨한 잣대로 복제 여부의 기로에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건국대학교 분자생명공학과 L씨는 해결책으로 정부 지원을 꼽았고, 경동대학교 간호학과 C씨도 가격 인하를 해결책으로 꼽아 반값 등록금 추진 등과 같이 높은 교재값이 노출된 학생들이 당국의 도움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문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는 K씨는 "교재를 구입해도 진도를 끝까지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쓴소리를 했다. 교수진에서 수강신청을 한 학생들을 책 강매를 해도 되는 어장 속 물고기쯤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비판인 셈이다.
지식을 얻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될 대학촌, 하지만 생존경쟁에 내몰린 88만원세대 대학생들이 적잖은 국면에서 그야말로 쓸 데 없는 책을 강의 주교재로 지정하는 횡포나 불필요하게 책값이 높아지는 경향(매년 별다른 개정 사항도 많지 않은데 신판이 나오거나)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복제물을 끼고 다니는 학생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