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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하우스푸어도 구제하는데, 황립 숙명여대는…

임혜현 기자 기자  2013.05.08 10: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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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서울 청파동에는 1906년 설립된 유서깊은 대학이 있다.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로부터 땅과 경비를 보조받아 설립한 명신여학교를 모체로 성장한 숙명여대다.

이 학교는 세칭 명문대 명단에 한 자락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종종 분쟁에 시달리며 교세를 더 뻗어나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근래 삼보컴퓨터 계열 이사장 등이 물러나고 손병두 전 서강대 총장 등을 중심으로 한 새 이사장-이사진이 들어서 학교가 다시 발전할 전기를 맞이할지 주목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사실상 거의 마지막 난코스가 하나 남아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교지 일부가 국유지를 무단 점유하고 있다며 변상금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숙대는 이 땅은 1930년대에 이왕직(옛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등 뒷바라지를 하던 일제시대 관청)에서 무상사용을 허락한 것이라고 맞서고 있으며 머지않아 그 판결이 나올 것이라 한다.

숙대가 땅 분쟁에 시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규선 전 총장 시절(1990년대)에도 무단 점유 등 문제가 불거졌는데 이후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무사히 잘 매듭지어진 것 같았지만, 그 문제 하나만으로 끝나기엔 곡절많은 학교 역사 만큼이나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은 2만제곱미터 가량이라고 하는데(6000평 정도), 연세대 신촌 캠퍼스가 80만제곱미터를 좀 웃돈다고 알려져 있는 것과 비교하면 큰 면적은 아니다. 이런 땅에 명문대 하나의 명운과 옛 황실 재산 관련 법리 구축의 막중한 무게감이 실려 있다니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이번 소송을 엄정히 몰아붙이려는 캠코의 입장은 아직 구 황실 재산이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무엇보다 통일 이후 현재의 미수복지역 내 황실재산 관련 정리에 이번 문제가 법률적 중요 케이스로 참조될 여지가 높다는 데서 확실히 일을 해 두고 싶은 충정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숙대로서는 차라리 국유지를 자주점유했다면 하는 탄식이 없을 수 없는데(국유잡종지 시효취득 대법원 판결 등), 문제는 이 땅을 사용하는 문제에 황실 관련이라는 특수성이 개입돼 있기 때문에 난이도가 더하고 있다는 데 있다.

황실의 재산을 국유로 모두 몰수할 것인지, 또는 평민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집안이나 개인 재산으로 내줄지는 일의적으로 말하기 어렵고 어느 처리 방식이 옳다고 할 것도 아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민국 수립이 되던 때에 선통제(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 푸이로 잘 알려진)의 처우 문제를 놓고 협상이 있었다고 하나, 그런 것이 지켜질지의 현실적 문제에서 보거나 또 이제 와서 황실을 특별히 예우할지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쉽지 않을 것 등에서 보면 우리나라 황실에 재산을 내 주는 문제는 쉽지가 않다. 현재 사정을 굳히는 게 답일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숙대 부지 처리 문제는 이 황실 대우 문제와도 결이 다르다고 생각된다(물론 이 논의는 황실 재산을 무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이왕직 문서의 진성성립을 기본전제로 한다. 혹시나 이 문서가 가짜라든지 하는 경우는 당연히 논의 자체가 가치가 없어지고 캠코의 청구가 옳은 게 될 것).

러시아가 구 소련을 명시적으로 국가 승계한다고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그 의무 및 권리를 승계한 것으로 묵인되고 있다는 국제법적 견해도 있는 것을 보면(세부 설명이 약간 다른 학설도 존재 가능), 현재 우리 당국이 조선 황실의 의무 등에 전혀 모른 척 하는 게 맞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구 황실이 처리한 혹은 일제시대 이후 옛 황실 관련 문제를 관리하던 이왕직의 행동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명시적으로 이를 모두 거부하는 게 온당한지의 문제다.

미국의 경우 남북전쟁 이후 남부 행정당국의 처리에 대해 일상의 국민 생활과 관련된 각종 신고수리 등에 대해서는 모두 효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처리했다는 사례도 있다.

그래도 땅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해 주기 어렵다는 특례 불가론을 들고 나오는 이들도 있을 수 있지만, 1967년 당시 구 문교부의 구상을 언급한 보도를 보면 '이방자씨(일본에서 와 옛 황실과 결혼한 인물이며 현재 별세) 계열의 왕당파도, 윤태림씨 등 재래파도 아닌 제 3의 인물'에 재단을 맡기자는 논의가 당시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이런 보도 사례로는 예를 들어, 그해 3월1일 경향신문).

일명 준국대추진론이다. 국립대학에 준하는 형식으로 분쟁 문제도 해소하고 학교의 여러 문제까지 해결하자는 구상인 셈인데, 원래 옛 황실이 직접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인 학교였던 점 등 특수성을 본다면 이 당시 이렇게 처리 못할 바도 아니었다고 본다. 이 같은 준국대추진론을 이제 새로 꺼내들기엔 어려운 점이 있을지 모른다.

다만, 이번 문제에서 판결이 혹시 숙대 전면 패배로 나오는 경우, 캠코가 특례임을 명시해서 학교의 연구 활동과 학생들의 면학을 위해서만 땅을 사용하도록 해 주면 적당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숙대는 이경숙 전 총장 시절이던 1995년 졸업생들에게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운동을 촉구할 정도로 재정이 부유하지는 못한 상황에 오래 노출돼 왔다. 그런 환경에서 이만큼 성장한 것 자체가 기적이다. 이런 저력있는 학교를 큰 경제적 난관에 직면하게 하면서까지 황실재산 관련 법리 분석을 매듭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머리로는 동의를 하지만 심정적으로 일말의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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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하우스푸어도 구제하는 상황이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국권이 기울어가는 시대에, 남성도 아닌 여성들의 고급교육을 위해 세워져 그간 민족 역량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던 학교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정도를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한 100년 가량 거치기간을 두고 여유있게 매입할 수 있게 해 주는 정도도 가능할 것이다. 망해가던 황실이 돈을 털어 학교를 세운 뜻을 생각해서라도, 이 문제는 캠코가 혼자 결단하기 어렵다면 상급 의사결정권자들이 고심을 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