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가끔 외부 취재나 원거리 출장을 나가면 뭔가 물건을 좀 사오고 싶은 경우가 생깁니다. 주로 박람회나 해외 출장의 경우가 그런데요.
서울성수수제화생산협동조합을 지난 초봄 찾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사회적 협동조합이 막 이슈화되던 시기에 예전 취재원 연줄을 통해 취재를 부탁한 경우였습니다(그날 취재된 사회적 협동조합에 관련된 여러 발언과 현실적 조언은 : ☞기사 보기).
서울 수제화 관련 업체의 80%가량이 밀집한 성수 지역. 빠듯한 소득과 열악한 노동 조건 등으로 수제화 산업이 침체기에 접어든 상황을 타개하고자, 이 성수 지역을 무대로, 기술력과 서로간 연대로 이를 극복하려는 조합 추진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거리도 가깝지 않으려니와, 공방들 사이에 숨어있는 조합 사무실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았는데요.
후배 기자를 쉽지 않은 길에 대동하고 간 데다 막상 예쁜 수제화를 다량으로 보게 되니, 취재 중에 한 켤레 사 줘야 하나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또 막상 좋은 수제화를 최대한 저렴하게 팔겠다는 조합 취지를 취재, 정리하다 보니 '매상'을 좀 올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는데요.
취재를 나가 보면 가끔 뭔가 물건을 사고 싶거나 사 줘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후배를 고생시킨 날, 예쁜 물건을 발견한 날, 사연있는 물건과 그걸 만드는 사람을 만난 날. = 임혜현 기자 |
그런데 막상 그렇게 못 하고 말았는데, 이날 취재 대상이었던 분은 1985년 겨울 평화빌딩 옥상시위로 구속되는 등 학생 운동에 투신했고, 이후 오랜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분이 왜 수제화와 연이 닿아 조합을 결성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는가 하면, 학생 운동 와중에 구두공장 취업을 해 기술을 배웠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군사 독재가 끝나고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도 옛 민주노동당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화공'으로서 원점으로 돌아왔고 저희 취재에 응했던 것이지요.
즉, 아는 기자가 왔는데 물건을 팔 분도 아니고, 판다고 한들 헐값에 내놓을 것 같아 어떻게든 강권을 해서 살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또 한 가지 가장 큰 이유라면, 그날 갖고 나간 현찰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무리수를 두는 대신 '나중에'를 생각한 것이 가장 컸습니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이 분이 그야말로 급서(急逝)했다는 부고를 접했습니다. 이해삼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서울성수수제화생산협동조합 이사 역할을 하던 분이 21일 차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민주화 운동 이력도 이력이지만,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노력했던 고인의 모습을 기억하던 저는 부음을 듣고는, 다시 먼 길을 돌아 제화공들과 함께 하던 인터뷰날의 그 분 모습을 떠올렸고, 그러다 어쩐지 '그 분이 만약에 독재 시기에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면'이라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1963년생, 고려대에서 수학교육학을 공부하던 분이었으니, 연령대를 고려하면 평탄한 길을 택한 경우 지금쯤 아마 평범한 수학 교사 혹은 그 이상이었을 걸로 상상해 봅니다. 더 나아가 교장이나 교감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교육행정직으로 풀려 장학사 혹은 장학관을 했을 확률도 높았겠지요.
고 이해삼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 임혜현 기자 |
민주화 비용을 이제야 보상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신발값마저 아끼는 세상인데, 우리 사회가 이런 분들에게 정말 인색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민주화(民主化)의 길을 걸어온 민주화(民主靴)를 만들던 분이 떠나셨는데, 부고기사(obituary)를 정말 잘 쓸 능력이 안 되어 이 글로 갈음하도록 하겠습니다.
고 이해삼 서울성수수제화생산협동조합 이사(1963.6.2~2013.4.21). 옛 민주노동당에서 △비정규직 철폐운동본부장 △최고위원 △광진을 지구당위원장 등을 역임. 노동자 특히 새로 한국 사회 병폐로 떠오른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는 세평. 2013년 별세.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