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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어윤대 KB 회장 항의사표를 막아라

임혜현 기자 기자  2013.04.15 15: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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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공식적으로 사전에 실릴 만한 단어는 아니나, '항의성 사표'라는 개념이 종종 회자된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을 희망하오니…"로 진행되는 짤막한 요식행위에 사실 항의의 뜻을 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냥 형식상은 일반 사직서와 동일한데, 좋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사직서를 내는 경우 뭔가 불만이 크게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항의성 사표의 위력은 대단해서 1971년에는 그 서슬퍼런 박정희정부의 사법권 침해 행위를 판사들이 뒤엎는 효과를 거뒀다(판사들이 대거 사표를 냈던 이 상황을 사법파동이라고 한다. 사법파동은 몇 차례 일어나 1,2,3차로 나눠 부르기도 함).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가 책에 쓴 바에 따르면(안 전 대표는 검사 출신) 5공화국 시절에 정권의 첨병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도구였던, 그런 반대 급부로 다음 출세길이 보장된 옛 서울지검 공안부 출신이 사표를 막바로 내면 정권에 대한 항의로 받아들여졌다는 대목이 있다.

해외에도 항의성 사표라는 개념은 존재한다. 1999년 중국에서는 고위관료인 정보산업부장이 항의성 사표를 제출했다고 해 AP통신 등 서방 언론이 주목하고 국내 언론에까지 소개됐다. 중국의 정보산업 정책을 이끄는 책임자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해 최고 수뇌부가 (통신 등 전영역에서) 너무 빠른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한다며 불만을 품고 일을 벌인 경우다.

14일 이팔성 우리금융그룹 회장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후임자 선출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최소한의 일정을 소화할 것이라고 하나 이미 마음이 떠나 조직 내외에서 후임 인선을 놓고 설왕설래 말이 나오는 상황이다.

이런 을씨년스런 사정을 한층 흉흉하게 하는 것은 그의 사의 표명이 휴일 중 보도자료 배포라는 방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1967년 우리은행에 신입 행원으로 입행한 이래"라든지 "민영화가 빨리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등 여러 절제된 표현 몇 가지만으로도 자신에게 압력을 가한 여러 사람들에게 '항의'를 충분히 했다는 평가다.

이 회장은 옛 한일은행(현재 우리금융의 근간인 우리은행은 구 한일은행과 구 상업은행간 합병으로 이뤄짐)에서 금융인 생활을 시작했으며, 현재의 우리금융 체제는 창립 12주년에 불과하다. 한 갑자에 불과한 우리금융에서 우리 가족을 이끄는 사령탑으로 일했지만, 그는 자신을 1967년 우리은행 입행 출신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자기 정체성 주장과 민영화 염원 표시는 공적자금으로 탄생했다는 우리금융과 우리은행의 원죄로 너무 많은 괴로움을 우리 가족들이 짊어지고 있다는 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아무리 당국에서 우리금융을 자신들이 창조했고 그러므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곳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위기를 넘긴 이후 지금까지 선전해 온 주인공은 우리 가족이며 우리 가족들은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에(그런 두 뿌리간의 화학적 융합 주장이 실상과 부합하는지 괴리된 것인지는 차제에 논하자) '1967년 우리은행 입행'이라는 표현 이상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칼날이 어윤대 KB금융그룹 회장에게 모아지고 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른바 MB맨으로 그를 꼽는 시각은 이미 지난 정권 중에도 많았다. 그러니, 평범한 갑남을녀들의 관심이나 이번 정권의 주요 관계자들 시선은 그에게 고울 리가 없다. 

문제는, 우리금융 문제에서도 그렇듯, 이런 외압과 갈아치우기 바람몰이가 과연 적절한가에 있다. KB금융은 시중은행 등 금융회사들을 거느리는 '민간 금융회사'다. 우리금융만 해도 공적자금이 들어가 있다는 특수성이 있으나, KB만 해도 이런 문제와도 상관이 없다.  

그런 와중에 어 회장도 드디어 못 참겠다 싶었는지 "사외이사들에게 물어보라"는 발언을 내놨다. 그가 이사회 구성원 중 사외이사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한 사정이라는 점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어 회장은 1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KB굿잡 우수기업 취업박람회'에서 기자들이 던진 질문에 "임기를 다 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발언의 결이 일부 언론 보도와는 다르다. 이른바 잔여 임기 보장과 연임 포기 문제를 연동해 처리했다는 밀약설에 대해 확실히 선을 그은 것이다.

급기야 어 회장은 연임 질문에 대해서도 원론적인 대답을 하면서 사실상 답을 피하는 대신 사외이사들에게 물어보라는 희한한 답을 내놓는다. 이런 발언에 같은 자리에서 나왔던 "KB는 민간 기업"이라는 회사 형태의 '정의'를 겹쳐보면, 아예 근래 오가는 해설 기사들과 다른 그림도 나올 수 있다. '사외이사들의 방해를 뚫고서까지 내가 연임을 하는 데 성공한다면 청와대의 GH 아니라 누가 말려도 안 내려온다. 당연히 이번 임기를 왈가왈부하는 건 코미디'라는 조롱을 그가 내심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못볼 바도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더 이상 그를 흔드는 게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의 발전과 관치의 상관 관계 같은 거창한 이슈에서만이 아니라 GH의 집권 초 업무 장악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금융공기업 수장 교체에 KB까지 같이 엮어야(당국자 발언이 계속 나오는 걸 보면 적어도 그 당국이라는 데는 이 문제에 직접적 수술칼은 안 들었더라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하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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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라도, 그가 연임 도전장을 던지고 또 그 절차에서 미끄러지면서 모호한 이별의 정한을 읊은 시를 남기고 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외국인 투자자들은 북한의 미사일이 발사되는가 마는가 그런 문제보다 오히려 서울의 후진적 금융 행태에 더 실망해 투자자금을 회수하려 들지 모른다. 항의성 사표는 회현동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이제 마무리를 준비하든 연임을 노리든 품위있는 제스처로 어 회장의 심사를 다독여줄 때다. 당국의 '마사지'는 불리한 보고서나 외국계 언론의 기사에 대해 이뤄질 게 아니라, 바로 이런 부분에 시도되는 게 도의상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