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사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소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일깨운다'
이는 영국의 시인 T.S.엘리엇의 시 '황무지' 중 일부로, 전쟁으로 황폐해진 극한 절망의 끝에도 희망이 존재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 시는 우리나라에서도 애송됐다.
흔히 위의 구절을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라고 번역하는데, 욕정의 사전적 정의는 '한 순간 충동으로 일어나는 욕심'이라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이던 당시에 특보를 맡았던 유종필 관악구청장이 위와 같이 일부러 단어를 달리 사용해 브리핑을 해 화제가 됐다. 소망으로 단어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분위기 자체가 달라 보이지 않는가?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과 노 당시 후보의 회동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다 보니, 자신이 한때 애송하던 시를 인용했다고 한다. 당장 어떤 성과를 언론에 명확히 제시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희망적인 분위기를 전하기에 적합했던 선택이었다는 평가다. '잠든 뿌리' 혹은 '일깨우다' 등이 사용된 시에 '욕정' 대신 '소망'을 더한 게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의 사례는 적절한 대변인(공보 관계자)의 역할, 재치와 감각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사례지만, 냉정하게 보면 정치적 레토릭(수사)이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같은 레토릭을 자기가 아는 게 많고 말재간이 있다 한들 아무 데나 아무 때나 사용할 수는 없으니 이런 기회를 누리는 것도 호사라는 생각이 든다.
6일 저녁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회동하기로 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당에서는 이들간의 단일화 논의가 대선을 그야말로 목전에 두고 있는 현재까지 질질 끌고 있다며 백안시한다. '3대 범죄라느니 하는 비판에 일명 후보를 못 내는 정당에 보조금을 국고로 줘야 하느냐는 '먹튀 방지법' 논의까지 있다. 반면 야권 인사들은 온도차는 있겠지만, 이번 단일화가 황무지에서 잠든 뿌리를 일깨울 계기이자 정권 교체의 모멘텀이 되지 않겠는가 기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느 쪽이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성과(내지는 불확실성 제거)'를 요구하는 수요는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모종의 결과물 제시를 바라는 현재의 압박에는, 대선 후보 등록이 임박했다는 '일정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감이 있다.
우선 이들 두 주자간의 단일화 논의 자체가 야합이냐, 혹은 정치적 결단이냐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일각에서는 두 사람간의 정치적 성향이 과연 하나의 끈으로 묶일 수 있는지 회의적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DJP 연합의 전례, '노무현+정몽준 연대' 같은 사례들은 결국 대선 승리의 기폭제가 됐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는 평가다. 혹은 정동영 후보와 문국현 후보간 단일화 논의가 결국 사그라들었던 것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어 이번 회동이 어떤 결실을 실제로 내놓을 수 있을지 걱정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평가를 유보해야 하는 점은, DJP 공조가 '의원 임대' 등 난감한 사례를 연출한 점이나 대선 하루 전 지지 철회라는 '해프닝'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들 사례는 연대라는 말에서 '정치공학적'인 '냄새'를 연상하게 하는 트라우마를 한국 정치사에 남겼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단일화가 될지 어떨지도 염려스러우려니와, 설령 된다고 해도 그리고 실제로 대선 승리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 자체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낼 '소망'이라고 성급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 이번 문-안 진영간 단일화 시도가 욕정인지, 소망인지 언제 어떻게 판가름할 것인가? 혹시 단일화 시도가 (문국현-정동영 케이스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면 욕정이 되는가? 대선에 지면 소망이 아니라 욕정인가?
그 답은 지나치게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진정성을 갖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정권을 잡겠다는 한 순간의 공통 분모와 계산 속으로 둘이 묶이는 데 머물면 결국 그 단일화는 정치공학의 생산물일 것이지만, 허심탄회한 대화 끝에 결론이 나온다면, 설사 단일화가 맞지 않다고 결론이 나거나 단일화 후 선거에서 국민들의 외면을 받아도 정치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주춧돌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