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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칼럼] 하찮음의 공포

장중구 코치 기자  2012.10.30 19: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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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3년 전 가을 지인으로부터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K 차장을 소개받았다. 코치인증시험을 앞두고 한창 코칭실습을 하고 있던 중이라 상대가 누구든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K 차장은 비단 코치로서가 아니라 직장생활의 선배로서도 꼭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의 고민과 그가 매일같이 겪어야할 심적 고통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과거 내가 겪었던 것이고 나아가 40대 직장인 대부분이 당면한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마치 내일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심하게 공감하는 것 이상으로 속 시원하게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초보 코치로서 열정은 어느 누구 못지않았지만, 경험도 부족하고 기량 면에서도 미흡한데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뿌리 깊고 고질적인 사회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지 요즘 들어 자주 K 차장을 떠올리게 된다. 독일 카를수르에 대학에 재직 중인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올봄 ‘피로사회’(문학과 지성사)라는 책을 통해 현대인들이 피로에 지치고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를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이 스스로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상태에 빠져들게 한다고 진단하였다.

이스라엘의 실존 심리학자 카를로 스트랭거(Carlo Strenger) 역시 최근 발간된 ‘하찮음의 공포’(The fear of insignificance주1)라는 책에서 비슷한 진단을 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과 비교하게 하는 세계화 체제 때문에 현대인들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호모글로벌리스(Homo globalis)라는 새로운 존재로 표현하였다. 아울러 “자기계발 분야의 권위자들이 인기와 부는 의지와 용기에 달렸다는 달콤하고 얄팍한 조언을 함으로써 실존적 불안이 더욱 커졌다”라고 덧붙여 말하였다.

나와 처음 만날 당시 K 차장은 한 밤중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한숨지으며 눈시울을 적실 정도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는 엄연히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간부사원이었음에도 “현실을 버티는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일중독이라고 할 만큼 일에 빠져있으면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전혀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자존감 역시 매우 낮아진 상태였다.

그는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동조하는 기색을 보이면 당장 회사를 그만둘 것만 같았다. 그래서 코칭의 1차적인 목표를 현실과 직면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데 두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막연한 대안들이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질문을 주로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그때는 코치로서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살아온 모든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K 차장이 현실도피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썼다.

최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K 차장은 아직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나와 만나기 전과 지금의 그의 생활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현실과 마주하며 씨름하고 있는 모습이 나로서는 고맙게 느껴진다. 그래서 올 가을에는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 현실 속에서 가까스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코치역할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랭거가 지적했듯, 우리는 삶과 직업 생활을 혼동한 나머지 삶을 직함, 지위, 성공 등 시장성 있는 이력서로 표현하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성과주의에 의해 매겨지는 순위에 따라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절망에 빠진다. 하지만, 실존주의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모두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난 피조된 존재이다.

   
 
역시 피조물일 뿐인 타인들로부터 존재 자체로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는 환상을 쫒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공포는 대상을 잘 모를 때 가장 크게 느껴진다. 알면 알수록 오히려 대담해질 수 있다.

장중구 코칭칼럼니스트 / 공학박사 / 한국코치협회 인증 전문코치 / 장중구 코칭카페(www.realangel.co.kr) 대표/ 상진기술엔지니어링 전무

[주1] Carlo Strenger의 The fear of insignificance는 하늘눈 출판사에서 '멘탈붕괴'라는 제목으로 번역(최진우)본을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