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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사장학] 동적요소관리 부서 ‘사장실’이 게슈타포? 

[제39강]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과 수펙스 추구2

허달 코치 기자  2012.07.20 08:3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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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존중과 신뢰, 휴먼 커뮤니케이션이 키 워드가 되고, 명분을 중요시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적 원형(Archetype)이라는 이어령 교수의 연구 결과와 앞서 제5강에서 언급했던 액설로드(Axelrod) 교수의 ‘자발적 협동이 일어나는 조건’을 연결해 보면 그것이 바로 최종현 사장학의 ‘동적요소관리’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희한한) 사람들의 힘을 모아 한강변의 기적을 이루었느냐’는 이어령 교수의 한국 기업가들에 대한 찬탄을 곧이곧대로 질문으로 받아들여 굳이 답변하기로 한다면, 그 대답은 ‘구성원들로 하여금 영구히 존속 발전하는 기업을 만들자는 약속을 하도록 하고, 그들의 동적요소를 끊임없이 관리하여 자발적/의욕적인 두뇌활용(Brain Engagement)과 조직 내에서의 자발적 협동, 시너지의 창출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 그래서 ‘동적요소관리’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의 이야기이다.

지금의 SK이노베이션(주), 당시 유공을 모델로 만들자는 생각으로 '사장실'(사장이 있는 방이라는 뜻이 아니라 SK 특유의 조직의 이름이다. 영어로는 Office of Staff to the President)이라는 특유(特有)의 조직을 설치하였다.
 
‘사장실’의 주된 임무는 SKMS를 확산하며, 전 사원, 전 부서의 동적요소 수준을 파악하고 이를 향상시키는 것. 그래서 팀을 나누어서 전사원(全社員)을 전수(全數) 면담하기로 했다. 약 30명의 사장실원이 3000명 가까운 사원을 일일이 개별 면담하는 방식이었다. 지금 같다면 코칭 기초 교육을 통해 면담기법을 좀 맛보도록 교육시켜 내보내었다면 훨씬 효과가 컸고 좋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전문교육이 아직 없었다.

면담을 통하여 동적요소 수준을 정량적으로 계량한다고는 했지만, 절대적 계량방법이 없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밖에는 계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준 측정을 상, 중, 하, 이렇게 나누어 하다가 '중'에 너무 몰리는 경향이 있어 이를 또 '중상', '중', '중하', 이렇게 나누기도 했다. 개인별 평가도 했지만 그 결과는 일반화해서 조직단위로 발표하도록 했다.

지나치게 프라이버시를 건드리게 되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어떤 개인에게 너는 동적요소 수준이 이래서 남보다 떨어진다고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걸 받아들이려는 마음보다 반발하는 마음이 먼저 일게 마련이다. 그러나 너희 부서에 이러이러한 동적요소 수준의 문제가 있다 하면 다소 반발하면서도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수준이 문제야, 나는 중간이야 가고말고' 하는 자세부터 시작이지만, 그러면서 자기 반성도 뒤따라 오는 현상이 나타났었다.

어쨌거나 3000명의 전수(全數) 면담을 진행하고 이를 피드백 한 것은 참으로 장관(壯觀)이었다. 예를 들어 A 부서의 코디네이션 수준은 '중하'의 수준이다. 이렇게 평가가 나갔다 하자. 그냥 그렇게 평가의 결과만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는 무엇이며, 개선하려면 이러저러한 조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하는 권고도 함께 나간다.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부서나 부서장도 있지만, 따지고 드는 부서도 있다.

   
 

코디네이션을 위해 부서의 목표나 일 처리의 효율이 저하되어도 좋단 말이냐? 사장실이 무슨 게슈타포냐, 정치보위부냐, 그렇게 뒤에서 쑤군거리기도 하고 또 공공연히 불평들도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한해, 두 해 같은 일이 반복되고 동적요소 조사 결과가 조직과 개인의 향상을 위해 쓰이는 것이지 잘 못하는 사람을 가려내어 벌을 주자는 것이 아닌 것이 판명되면서 호응도도 높아졌다. 조직의 리더들이 이 작업을 가만 보니까 참 편리한 점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한국적 인간관계에서는 부하 직원에게 정면으로 '너 이걸 고쳐라' 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은데, '사장실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자'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훨씬 부드럽다는 것이었다. 한 오 년 지나니까 실제로 전사적으로 동적요소 수준이 크게 향상된 것이 드러나 보였다.

그래서 무엇이 이루어졌느냐? 그렇다. 그것이 문제였다.

전반적인 경영자 자질(資質)이 향상된 것만은 틀림 없는데,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So, what?) SKMS 써진 대로라면 그 결과가 이윤극대화에 직결되어서 이익이 펑펑 쏟아져 나와야 할 텐데, 회사의 수익성이 조금씩 개선 되기는 했지만, 쏟아 부은 노력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좋아졌다고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기야 이것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다고 가슴 쓸어 내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80년대 말로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울산은 마치 노사(勞使) 관계 혁명의 전초기지(前硝基地), 뇌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의 강성 노조가 판을 치고, 공장을 점거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그러면서 다음 번 목표로 삼은 것이 에너지 기업 유공이었으니까, 아무리 문단속을 해 보았자 불씨가 제거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노노(勞勞) 간의 강성(强性) 경쟁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어려운 고비가 많았지만, 어떻든 SK그룹은 노사분쟁 없이 그 기간을 넘겼고 지금까지도 노사의 극한적 대립으로 큰 문제가 야기된 적이 없음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SKMS의 공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SK그룹은 기업 인수를 통해서 그 성장을 이룩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실상 1980년의 유공 인수, 90년대의 한국이동통신 인수, 그리고 이어서 신세기통신의 인수 등 굵직굵직한 인수를 통해 성장한 것이 사실이고, 최근에는 하이닉스를 인수한 것이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기업인수라는 것이 그냥 돈만 써서 하면 되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앞에서도 최종현 회장의 현실을 인식한 경영의 예를 들면서 언급했지만, 오죽하면 모 대통령 당선자의 외압(外壓)에 굴복해 SK가 그 어렵게 경쟁하여 따낸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하게 되고, 후일 민영화 되는 한국이동통신의 인수 기회를 부여 받았을 때, 일부 경쟁 그룹들은 가만히 쾌재를 불렀다는 것이다.

'SK가 이제는 죽을 자리에 들어섰다. 비효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국영기업체의 복마전 같은 조직과 인원을 인수해서 어떻게 민간 기업으로 새로이 부상하는 제2이동통신사와 경쟁해 이길 수 있겠느냐?’

그때 회장의 말이 간결하고 재미있었다는 것은 이미 소개했었다.

“그래? 걱정 없어. 우리는 SKMS가 있잖아?”

그렇다. 문화를 가지고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은 이런 자신감에서 크게 차이가 나게 된다. 그저 말로만의 자신감이 아니었다. 훌륭히 그 일체화(一體化) 작업을 성공해 내었다.

그러나, 이렇게 소위 문화적(기업문화)인 면, 또는 수익성의 방어 측면 말고, 이윤 추구의 공격적 측면에서 SKMS와 동적요소가 어떤 역할과 공헌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는 그 대답이 시원하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의 솔직한 평가였다.

‘그렇다면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어떻게 바꾸어 해야 하는가’, 그런 자성(自省)이 시작되었다. ‘회장 작품인데… 우리가 손을 대도 될까?’ 하며 쭈빗거리는 노땅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소장파들도 있었다.

실은 최 회장부터가 이 점을 공개적으로 고민하였다. 글로벌리제이션, 무한경쟁의 위협이 눈 앞에 다가드는 것을 선구자적 통찰을 갖고 피부로 느끼던 그가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Globalization 과 수펙스 추구3이 다음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