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는, 날(生)것의 세계와 다듬어진 세계를 넘나드는 참으로 희한한 사람이 있다. 개인전이 벌써 여섯 번째이니 화가이고, 시집도 냈으니 시인이다. 시는 이미 진중함을 지나 내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림 역시 인상 깊기는 마찬가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안광을 ‘쏴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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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선 ‘수상한 삶’ 80.3×100㎝·캔버스에 유화·2005> | ||
화가 유명선과 그의 그림들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젊은 시절(그는 아직도 30대 후반으로 착각할 정도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지만 지천명이 눈앞이다) 미대에서 그림을 배운 적은 있으나, 도중에 그만뒀다. 그래서 독학에 가까운 그의 그림은 ‘독특’하다. 15년 가까이 스스로의 삶을 캔버스에 옮겨온 ‘내공’이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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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선 ‘시원(始原)’ 60.6×72.7㎝·캔버스에 유화·2004> | ||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독이 가져오는 두려움과 고통의 변죽을 울리려는 행위가 아니다. 정면으로 응시해 중심을 흔들기 위한 ‘몸짓’인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 쌓은 성벽 너머의 그 무엇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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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선 ‘업’ 100×80.3㎝·캔버스에 유화·2006> | ||
그러나 인간 유명선은 그림에서 느껴지는 ‘우울’과는 전혀 다르다. 작업실 겸 찻집을 운영하는데, 여럿이 앉아 술을 마시든 차를 마시든 사람들을 흡인해 버리고 만다.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손자를 아련한 손짓 하나로 불러 이끌듯, 푹신한 이불처럼 모두를 덮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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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선 ‘소통불능’ 30×60㎝·캔버스에 유화·20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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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선 ‘시인’ 45.5×53㎝·캔버스에 유화·2006> | ||
화가 유명선 역시 지천명에 가까운 삶이 녹록치 많은 않았음이 그림 속에서 드러난다. 프리즘을 통해 나오는 것은 타인의 삶도 있지만, 결국
알게 모르게 자신의 빛깔도 담아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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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유명선-화실에서> | ||
고통에게도 물기가 서려 있다면, 그것은 멍든 푸른 눈물일 것이다. 제목도 주제도 무의미하다며 39점이나 되는 자신들의 작품을 ‘가출’시켰다고 말하는 화가 유명선. 푸른 눈물을 그동안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뜨겁게 흘렸는지 더듬이를 뻗어 저릿한 고통이 온 몸에 퍼지도록 예방주사를 맞아보는 것은 어떨까?
010-8662-9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