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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칼럼] 외로움 끝장내는 법: 나르시스신화를 통해 보다

이시스 원장 기자  2012.06.29 13: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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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제우스는 유명한 바람둥이다. 그는 곧잘 아내 헤라에게 바람피우는 것을 들켜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게 했다. 그래서 제우스는 수다스런 이야기로 듣는 이의 혼을 쏙 빼 놓는 것으로 유명한 요정 에코에게 아내 헤라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에코(우리말로 ‘메아리’라는 의미)는 숲과 산이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아주 사랑스럽고 수다스럽고 아름다운 요정이었다. 그녀는 제우스의 부탁대로 헤라를 만나 이런저런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헤라는 정신없는 에코의 이야기를 듣느라 그만 제우스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를 놓쳐버렸다. 그리고 후에 에코가 제우스의 바람기를 감춰주기 위해 이같이 한 사실을 알았고, 그녀는 분노하여 에코에게 벌을 내렸다. 다시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스스로 말할 수 없으며 오직 타인이 말한 것만을 따라 할 수만 있도록 했다. 

강의 신 케피소스와 님프인 리리오페 사이에 태어난 나르시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나르시스는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미소년으로 유명했다. 그의 나긋한 몸매와 아름다운 눈동자 그리고 향긋한 향기를 풍길 것 같은 사랑스러운 곱슬머리에 숲의 모든 님프들과 신들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아직 소년인 나르시스는 이성적인 사랑을 몰랐기에 관심이 없었고 이성을 느끼지도 않았다 .

 요정 에코가 나르시스를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숲에서 나르시스가 가는 곳마다 조용조용히 나르시스를 따라 다녔다. 에코의 나르시스에 대한 사랑의 갈망은 점점 커져갔고 점점 간절해졌다. 더는 조용히 따라 다닐 수만도 없었고 숨길 수도 없게 된 어느 날 에코는 용기를 내어 숲에 있는 나르시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르시스는 갑자기 앞에 나타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요정을 보고 물었다 .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러나 에코는 상대방이 한 말만 따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에코도 나르시스의 말을 따라했다 .

“당신은 아주 아름답네요.”

나르시스가 말했다.

“당신은 아주 아름답네요.”

에코는 나르시스의 말을 따라만 해야 했다. 자신의 사랑을 알리려는 의도와는 다르게 바보스런 장난처럼 말을 되받기만 했다.

나르시스는 장난스런 숲의 요정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떠난 후 다시는 요정 에코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절망한 에코는 너무도 슬프고, 너무도 애가 타서 그만 죽어버렸고,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만이 숲과 들, 그리고 나무들과 푸른 초원 위에 남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르시스는 숲과 들에서의 생활에 열심이었고, 이를 본 에코의 동료들은 나르시스가 에코를 죽게 한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르시스가 자신의 외모가 아름답다기에 거만하게 군다고 여겨 화를 냈다. 에코의 동료들과 나르시스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님프들은 신에게 거만하고 오만한 나르시스를 벌을 주도록 기도했다.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오던 나르시스는 호수 가를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호수 속에서 한 소년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은 저녁에 산봉우리로 넘어 가는 햇살처럼 온 세상에 금빛을 뿌리며 마지막 생명을 내리는 듯 빛을 발했고, 한 송이 꽃의 허리를 휘감는 한 줄기 바람처럼 나긋했으며 숲의 들꽃무리처럼 향기롭고 암사슴의 자태처럼 늘씬한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나르시스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무릎을 꿇고 호수에 엎드렸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물속에 있는 그 사람은 나르시스의 말을 흉내 내기만 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너무도 아름다워 키스를 하려고 하면 다시 사라졌다가 조금 후에 다시 나타났다. 손을 내밀면 또 사라졌다가 조금 후에 다시 또 나타났다. 나르시스는 너무도 애가 타고 너무도 안타까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호수 속에 비친 그 얼굴을 몇날이고 며칠이고 바라만 보았다.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며 그는 점점 쇠약해져갔다. 그리고 끝내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나르시스가 죽은 그 자리에는 나르시스의 금빛 머리카락을 기억하게 하는 나긋하고 아름다운 노란 한 송이 수선화가 피어났다.

이 나르시스의 신화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깊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로 알려진 오흐리드 호수의 전설이라고도 한다.

이 신화는 매우 슬프고 불행하게 끝난 신화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깊고 근원적인 ‘외로움’에 대한 상징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화의 상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외로움은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어떻게 외로움을 끝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와 사랑스러운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나르시스는 그 자신의 모습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너무도 평범한 일개 사내아이로 생각했다.

사실 외모가 ‘잘생겼다 못생겼다’ 하는 평가들은 성장하면서 그 판단과 기준이 주입되는 것일 뿐이다. 본래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는 것이다. 현대에는 이미 두, 세 살 정도부터 보게 되는 텔레비전 등 미디어의 영향과 외모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인해 일찍부터 외모에 대한 인위적인 구분과 판단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인위적 자극이 없는 자연 속에서 자란다면 순수한 아이들은 소년시절 혹은 청년시절이나 어쩌면 평생 외모에 대한 편견이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순순한 자연의 일부로 성장 할 것이다.

나르시스를 아는 주변 신들과 요정들 그리고 사람들은 현대의 우리들처럼 나르시스에게 ‘잘생겼다, 멋지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고 말해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들은 만나면 나르시스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외모의 아름다움을 찬양했고 그러면서 스스로 그 사랑의 감정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사람간의 관계와 사랑을 알기에는 아직 어린 미성숙 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의 구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숲과 산에서 사냥이나 채집을 하며 자신의 생활을 즐겼다.

나르시스에게 빠져든 요정 에코도 사랑을 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신화에서는 헤라가 그녀의 의사소통 능력을 뺏어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다만 은유적 장치에 불과하다.

에코는 아직 의사소통 능력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리지도 표현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했다. 오직 어떻게 상대방이 자기 마음속의 사랑을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소년도 미성숙한 상태이기에 소년도 소녀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사랑이 이루어질래야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가장 많은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메타포의 관점으로 나르시스 신화를 보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첫째는 나르시스처럼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외로움이 있고, 둘째는 에코처럼 미성숙함으로 관계와 관계 속에서 원활하게 소통을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외로움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두 청춘남여가 만나서 소통이 안 되어 제대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보통은 전쟁이 따르고 복수가 따르게 된다. 소통이 안 되는 관계는 나아가거나 향상되거나 어떤 설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 관계는 끝이 날 수 밖에 없다.


에코는 처음에는 굉장한 수다장이였다. 한번 말을 하면 하루 종일 이야기를 끊이지 않았고, 한번 에코의 이야기를 듣게 된 이는 신이든 사람이든 요정이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에코를 떠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무의미한 수다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은 ‘에코’란 상징으로 드러내는 첫 번째 특성 중에 하나이다. 산과 들에 대고 아무리 외쳐도 오직 그 자신의 목소리만 듣고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지 못하는 것처럼,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오직 자기 자신의 이야기만 할뿐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할 수도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런 에코가 이제 자기 삶에 의미가 있고 값어치가 있는 말, 어쩌면 그 가슴 속의 진심이 담긴 말, 상대방의 영혼에게 가 닿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데 정작 그런 말은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앞에 헤라에게 수다를 떨던 때와는 정 반대로 너무도 소심해져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대화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의지하면서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 주는 것이 대화의 전부이게 되었다.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표현은 고사하고 그저 모든 소통의 열쇠를 상대에게 넘긴 상태에서 지극히 수동적이기만 한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에코’란 상징으로 드러내는 두 번째 특성 중에 하나이다. 오직 누군가 했던 말만 되풀이하고 따라하게 되는 것 이외에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다움을 표현하며 독특한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창의적인 다른 말들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코’식의 소통은 미성숙한 소통을 상징하는 것이다.

현실 속의 우리도 실은 소통에 있어 이 양극단을 오고가는 경우가 많다. 올바르게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말과 이야기를 또 적당하게 받아주며 사람간의 에너지와 말의 의미가 서로에게 흘러가고 흘러오는 균형이 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깊이 주의를 기울이면서 또한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에 깨어 있으면서 상대방의 마음속 표현이 흘러나오도록 공간을 주고 또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정제하여 흘러나가도록 대화를 하면 서로가 마음이 열리고, 행복하고 기쁨이 끊임없이 샘솟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대화의 경험은 그리 흔치 않다. 수다쟁이를 만나면 지겹도록 그의 이야기만을 듣게 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또 누군가를 만나면 끊임없이 내 이야기만을 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방식으로 소통을 하고 있는 에코와 나르시스를 보면, 에코는 이제 나르시스가 자신의 사랑을 몰라준다고 원망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미성숙한 소통능력을 향상 시키려고는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텔레파시나 천리안 같은 초능력이 있어서 자기 자신의 마음속을 ‘척’ 하고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현대의 우리도 그렇다. 남편은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어서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늦게 집에 들어온다. 그는 아내가 자신에게 늦게 들어왔다는 잔소리 대신 “여보,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어서 늦은 것이겠군요. 고생 많았어요. 이리 와서 얼른 씻고 쉬어요”라고 말해주길 바란다. 아내는 낮에 하루 종일 표시도 나지 않는 집안일에 아이들 돌보느라고 지쳐있다.

남편이 일찍 와서 좀 거들어 주기를 바랐지만 남편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술이 만취해서 집에 들어왔다. 그녀는 남편이 비록 늦게 들어왔지만 “여보, 늦어서 미안해! 혼자서 하루 종일 고생 많았지? 아이들은 속썩이지 않았어? 힘들었지?”라고 자신의 고생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편은 일언반구도 없이 ‘늦었다고 잔소리 할 거면 입 닫아!’ 하는 방어적인 얼굴표정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내도 남편도 자신의 상황이 어땠는지, 그리고 자신의 느낌과 감정은 어땠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르시스는 극도로 외로워하고 있다.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요정이 어째서 자신을 놀리기만 하고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 않는지, 자기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행복 할 수 있는 지, 어떻게 해야 소통이 되고 서로를 포옹할 수 있는지 나르키소스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외부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해답을 찾게 된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탐구하게 되면서 진정한 자아 찾기 시작된다.

이것은 ‘에코’란 상징으로 드러내는 세 번째 특성 중에 하나이다. 에코(메아리)란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그대로 되돌아오는 현상이다. 자연현상이 아닌 우리 일상에서 이렇게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대로 반향 되어 되돌아온다면 우리는 저 앞에 있는 산이나 바위를 처서 부술 것이 아니라 바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 자신을 살펴야 한다.

이것이 이야기 구조에서 성장하고 초월하는 사람들이 해답을 찾게 되는 방향이다.

제우스는 그 자신 가장 강력한 신으로서 위로 더 나아갈 것도 없고 아래로 더 떨어질 것도 없는 영원불변하는 어떤 것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고 고치는 일은 없다. 나르시스 이야기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바람기를 멈추는 대신 에코를 시켜 헤라의 눈을 가리려 했듯이 제우스는 산을 향해 낸 자신의 목소리가 돌아오는 것이 불편하다면 번개나 우뢰로 때려서 산을 없앨 것이다.

제우스의 계보는 그 자신이 스스로 절대 변하지 않으려고 하고 모든 문제와 상황을 외부나 타인 혹은 상황 속에서 찾고 그것을 없애거나 개선하여 고치려는 ‘가부장’적인 태도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수많은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고 결국 그 자신이 극복의 대상이 되는 괴물이 된다.

나르시스는 어느 날 문득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때는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한 순간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면서도 자기 자신을 만나는 때가 드물고, 어떤 경우는 평생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도 진정한 자신을 알기 힘들다.

이때 자신을 반영해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거울’이나 거울 역할을 할 수 있는 ‘호수’나 ‘연못’ 등이다. 그래서 신화에서는 호수나 연못 등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만나는 근원적인 장소로서 변화와 변형을 일으키는 장소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 속의 우리에게는 거울이나 연못, 호수가 결국은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과 특정 상황’ 등을 의미하게 된다.

나르시스는 연못 위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고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해주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왜 여기 있지? 나는 왜 이런 모습이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등을….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요?’ 하는 이 질문은 이미 나르시스가 에코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질문을 자기 자신을 향하여 하고 있다. 나르시스 신화는 이즈음에서 스토리가 거의 축약되어 긴급하게 슬픈 이야기로 끝나버리고 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남겨진 상징적 언어로 우리는 나르시스의 나머지 메시지들을 따라 갈 수 있다.

나르시스는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면서 에코가 하던 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에코는 나르시스 앞에서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말을 되풀이 하며 홀로 애를 태웠지만 이제 나르시스는 자기 자신과 그렇게 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 역시 그렇게 쉽게 말문이 터지고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고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시 외부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반작용의 형태 혹은 의식은 무의식의 작용을 반영하고 무의식은 의식의 작용을 반영하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보여주는 원형적 틀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반해버린 상징은, 깊고 외롭고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면서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 열등감이나 혹은 질투로 고통을 받기도 하고 또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힘들어 하기도 하고 또 주위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평가 절하된 부정적 판단이나 시각으로 평생을 움츠러들어 지내기도 한다.

이것은 미성숙한 나르시스처럼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해서 그렇다. 우리는 관계와 관계 속에서 덜컹거리면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보려하게 되고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되면서 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부단한 노력 끝에 때가 되면 자기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너무도 사랑스럽고 너무도 아름다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과 사랑에 빠져들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타인에게 에너지를 얻기 위해 끌려 다니지도 않고, 타인의 평가에 감정의 롤러코스터도 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그 외로움이 끝나게 된다. 그저 나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이 가득해서 모든 것이 충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더없이 충만하고 가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말했듯이 "내 앞에도 아름다운 것이, 내 뒤에도 아름다운 것이, 내 왼편에도 아름다운 것이, 내 오른편에도 아름다운 것이"의 느낌을 가진 경이로운 가슴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들과의 소통과 관계를 제대로 해 나갈 수 있게 된다. 나를 찾으면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 또한 볼 수 있게 된다. 오직 나만이 아름답고 나만이 특별하고 나만이 전부인 오만과 거만이 결코 아니다.

꽃을 피우기 전에는 오직 나만이 이런 힘든 과정을 겪고 견디며 어렵게 꽃을 피우기 때문에 나만이 특별하거나 혹은 나만이 다르게 느껴 질수도 있겠지만 꽃이 활짝 피고 나면 자신이 꽃밭 속에 있고 자신이 수많은 꽃들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르시스는 쇠약해진 끝에 물에 빠져 죽어버리고 그 물가에는 애닮은 한 송이 꽃이 피어나 그 아쉬운 미련을 달래주고 있다.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그만 풍덩 빠져 버려 죽어 버리는 것! 어쩌면 우리에게도 이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죽어버린다는 것은 개체의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이전의 것들’이다. 예를 들면 열등감이나 ,무지 같은 것들이다. 그러하기에 그 죽음은 곧 승화나 초월 혹은 재탄생을 그대로 내포하게 된다.

신화에서 나르시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삶을 승화시킨 것을 그냥 수선화 꽃이 된 것으로 표현 했지만, 꽃은 단순한 하나의 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넘어선 승화이고 변형이고 초월이고 재탄생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재탄생이란 미성숙이 죽고 성숙이 탄생하는 것이다. 무지한 것이 죽고 지혜로운 것이 탄생하는 것이며 겁 많은 소년이 죽고, 용감한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며 사랑을 모르던 어린 소년이 죽고 이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용기와 능력을 갖춘 성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죽음은 ‘꽃 피움’으로 드러난다. 나르시스는 수선화로 ‘변형’되는데 꽃이란 거친 흙과 뿌리, 줄기, 이파리 등의 물질적 토대 위에서 가장 섬세하고 정묘한 신비로운 것만을 모아 만드는 그 식물의 정수이며 영혼이다. 

   
 
이렇게 상징으로 보면 나르시스의 신화는 단순한 슬픔의 신화가 아니다. 우리에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져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자기 자신을 만나고 그리고 자기다움을 꽃 피움으로서, 외로움을 끝장내라!”고 말해 주고 있는 신화이다.

이시스 필로현대최면센터 원장 / ‘신화를 통한 치유와 성장-상처와 아름다움’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