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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밥 아닌 쉰밥” 국내 상장 해외기업 속사정 들어보니…

중국고섬 탓 무조건 평가절하, 거래소 빠른 판단 ‘한 목소리’

이수영 기자 기자  2012.06.20 14: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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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눈 딱 감고 상장폐지하든, 감사의견 무시하고 거래를 재개하든 한국거래소가 빨리 움직여야 한다. 중국고섬을 더 끌어안고 가다가는 답이 없다.”-SBI모기지 주관사 담당자 A씨.

‘해외기업 포비아(공포증)’가 국내 주식시장의 고질병으로 굳어가고 있다. 지난해 중국고섬 사태 후유증이 해외기업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피 현상으로 번진 것이다. 엄격한 기업실사를 통과하더라도 공모가가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는 것은 보통이고 그나마 수요마저 씨가 말랐다.

이런 탓에 작년에만 국내 상장을 노렸던 해외기업 9곳이 줄줄이 상장계획에서 손을 뗐다. 올해도 연초 차이나그린피앤피에 이어 19일 패스트퓨처브랜즈(FFB) 역시 공모 절차를 취소했다. 청약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14~15일 이틀 간 진행된 수요예측에서 제시된 공모가는 FFB가 당초 희망했던 수준보다 20~30% 낮았다.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바에야 상장을 안 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해외기업 포비아’에 백약이 무효

‘해외기업 디스카운트’를 무릅쓰고 지난 4월 코스피 상장을 강행한 SBI모기지의 사정은 더 딱하다. 회사는 상장 첫날 공모가 7000원을 밑돈 6300원으로 거래를 시작해 이날 하한가를 찍었다. 당초 회사의 희망공모가 밴드는 7700~9200원이었다.

   
SBI모기지 마루야마 노리아키 대표는 19일 기자들과 만나 회사의 성장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저평가에 대한 인식 전환을 간곡히 호소했다. SBI모기지는 일본 유명 금융그룹 SBI홀딩스의 주력 자회사로 연내 한국시장에 모기지뱅크 설립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에서 독립해 일본 유명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SBI그룹의 핵심 계열사라는 배경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일본 모기지뱅크 시장 점유율 1위, 지난해 순영업수익 1301억원 달성 등 실적호조도 국내 시장에는 먹히지 않았다.

이달 들어 주당 300원의 상장특별배당과 30만주 이상의 자사주 매입도 실시했지만 회사 주가는 19일 종가 기준 6300원, 여전히 공모가대비 8% 이상 빠진 상태다.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자 SBI모기지는 19일 기자들과의 만남을 자청했다. 이 자리에는 마루야마 노리아키 대표를 비롯한 본사 임원진과 모그룹인 SBI그룹 기타오 요시타카 회장이 총출동했다.

이날 마루야마 대표는 회사의 견조한 실적과 성장성을 강조하는데 주어진 시간 대부분을 할애했다. 그는 한국인 사외이사 선임을 비롯해 투명경영 의지를 밝혔고 순이익의 30%를 배당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기타오 회장도 나서 “한국에 제1호 모기지뱅크를 설립할 수 있도록 올해 안에 구체적인 안을 발표하겠다”며 국내 비즈니스 진출 계획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에 대해 회사 관계자는 “이미 주택금융공사로부터 몇 가지 사업모델을 제시 받아 법률적인 검토를 마쳤다”며 “국내 진출 계획은 이미 상당부분 진척됐다”고 귀띔했다.

◆하나대투 “주가 정상화까지 매각 없다”

해외기업 디스카운트를 넘어 기피현상이 고착화되자 주관사의 입장도 난처해졌다. SBI모기지의 상장 주관을 담당한 하나대투증권의 경우 일부 기관투자자들이 배정 받은 물량 취득을 철회하면서 발생한 대량의 손실주를 모두 떠안았다.

총 213만4980주, 취득단가인 주당 7000원으로 계산하면 150억원 규모이며 지분율은 9.04%에 이른다. 그나마 다행은 주가가 최근 6000원대를 회복한 덕분에 40억원대에 이르던 평가 손실이 10억원 안팎으로 줄어든 것이다. 하나대투증권은 SBI모기지의 주가가 일정 수준까지 정상화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입장이다.

하나대투증권 관계자는 “최근 블록딜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주가가 8000원대까지 오르지 않는 한 절대 팔지 않겠다는 게 회사 입장”이라며 “지금도 주관수수료를 제하고 크게 밑진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이 SBI모기지의 적정주가를 1만4000원대까지 평가하는 만큼 시간을 갖고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해외기업에 대한 무조건적인 평가절하의 원인이 중국고섬 사태 때문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다. 여기에 ‘해외기업 포비아’를 더욱 부추기는 주체로 한국거래소와 중국고섬에 투자한 기관투자자들이 지목됐다.

◆“중국고섬에 당한 기관이 상황 악화시켜”

한국거래소가 중국고섬의 원주가 상장된 싱가포르거래소의 처분만 바라며 1년 내내 허송세월하는 동안 중국고섬을 바스켓에 넣은 대형 기관들은 일제히 몸을 바짝 낮췄다. 이는 다른 해외기업들이 줄줄이 공모주 시장에서 흥행 참패를 겪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하나대투증권 관계자는 “규모가 큰 펀드 중 상당수가 중국고섬에 묶여있는 탓에 섣불리 해외기업 주식을 추가 매수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며 “거래소가 상장폐지든, 거래재개든 중국고섬 사태를 빨리 매듭짓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공모주 시장을 단기 차익실현의 기회로 활용하는 국내 기관투자자의 인식도 해외기업의 국내 상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기관들이 공모주 청약에 뛰어들어 경쟁률과 공모가를 부풀린 뒤 상장 첫 날 주가가 급등하면 바로 차익실현에 나서는 행태에 대해 해외기업들이 대부분 수긍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먼저 상장계획을 철회한 기업들처럼 SBI모기지도 공모 단계에서 여러 번 엎어질 뻔 했다”며 “경영진에게 국내 IPO 시장의 생리를 이해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관 대상 IR을 준비하면서 경영진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그들(기관)이 우리 주식을 과연 얼마나 오래 보유할까’였다”며 “청약에만 경쟁률을 높이고 상장 당일 주식을 팔아치우는 기관을 주주로 인정도 안할뿐더러 IR을 진행하는 것에도 회의감을 드러내 설득하는데 적잖이 애를 먹었다”고 전했다.

한편, 해외기업의 국내증시 입성 계획은 내년까지 줄줄이 이어져 있다. 다음 주 일본 전자상거래 기업 액시즈홀딩스가 코스닥 상장을 위한 상장예비심사청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미국 바이오 기업인 액세스바이오와 영국 엠비즈글로벌 등도 국내 상장을 준비 중이다.